올라갈 것인가, 깊어질 것인가
연말 승진 심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회사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흘렀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긍정적이었다. 최근 팀 성과가 눈에 띄게 좋았기 때문이다.
"유 대리, 이번엔 승진하겠네."
입사 동기가 지나가며 바람을 넣었다.
오나래 팀장님도 나를 따로 불렀다. 승진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직속 팀장의 평가였다.
"유 대리님. 이제 실무는 김이수 주임이나 이선우 사원에게 더 과감하게 넘기세요. 윗분들이 바라는 과장은 실무자가 아닙니다. 관리자(Manager)죠. 이제 큰 그림을 봐야 해요. 그래야 승진합니다."
관리자.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걸렸다. 그날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관리 마인드'를 장착하려 노력했다. 습관처럼 매장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책상에 앉았다. 현장에서 고객을 만나는 대신, 모니터 속 엑셀 데이터를 분석하고 전략 보고서를 다듬었다.
옆 팀 강 대리는 그런 나를 보며 "이제야 과장 태가 나네"라고 했다. 그는 이미 완벽한 '행정가'였다. 보고서는 기가 막히게 쓰지만, 정작 현장 직원들의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몸은 편해졌는데, 마음은 공허했다. 김이수 주임이 현장에서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선우 사원이 까다로운 고객과 씨름하다가 막혀서 쩔쩔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내가 가면 바로 해결할 수 있는데.'
'저건 매뉴얼이 아니라 경험으로 풀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참았다. '내가 나서면 실무자가 클 기회를 뺏는 거야. 관리자는 기다려주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모니터만 바라봤다. 며칠 뒤, '내년도 영업 전략 보고서' 마감이 1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본부장님이 직접 챙기는 중요한 보고서였다. 나는 승진 심사를 앞두고 보고 자료 작성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때, 현장에서 전화가 왔다. 이선우 사원이었다.
"대리님... 죄송합니다... 지금 매장에 VVIP 고객님이 오셨는데... 도저히 해결이 안 돼서..."
수화기 너머로 고객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김이수 주임이 쩔쩔매며 사과하는 소리도 들렸다.
내 머릿속은 이렇게 갈등하고 있었다.
관리자의 길: "이 선우 씨, 김 이수 주임한테 넘기고 매뉴얼대로 대응해요. 나는 지금 중요한 보고서 쓰는 중이니까." (전화를 끊고 보고서에 집중한다.)
베테랑의 길: "지금 바로 갈게." (보고서를 덮고 현장으로 뛴다.)
모니터 속 엑셀 커서가 깜빡였다. 관리자는 보고 자료를 취합하고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내 팀원들이 현장에서 깨지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저장 버튼도 누르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고서는 나중에 깨지면 그만이지만, 지금 현장의 팀원과 고객을 놓치면 돌이킬 수 없다. 역시나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재킷을 벗어던지고 고객 앞으로 나갔다.
"고객님, 담당 유현상입니다. 많이 불편하셨죠."
나의 등장에 김이수 주임과 이선우 사원의 표정이 안도감으로 풀렸다. 나는 익숙하게 고객의 눈을 맞추고, 불만을 경청하고, 유연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20년이 넘는 경력, '베테랑'의 기술이었다.
20분 뒤, 노발대발하던 고객은 편안한 표정으로 매장을 나갔다. 상황이 정리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보고서 마감 시간은 이미 10분이 지나 있었다. 오나래 팀장님이 내 자리에 와 있었다. 모니터에는 미완성된 보고서가 떠 있었다.
"유 대리님. 보고서 마감 늦은 거 알죠?"
"죄송합니다. 현장에 급한 일이 있어서..."
오팀장이 땀에 젖은 나의 셔츠를 보았다.
"아까 보니까, 위에서 바라는 '관리자'의 모습은 아니던데요? 보고서 제치고 현장 뛰어나가는 과장이라니."
나는 뜨끔했다. 승진 심사를 앞두고 점수 깎일 행동을 한 건가.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관리자 그릇이 안 되나 봅니다."
"아니요. 관리자는 아닌데... '베테랑' 같았어요."
베테랑.
그 단어가 내 심장을 쳤다. 나는 그제야 내가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았다. 나는 팀장님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팀장님. 저는 실무를 놓지 않을 겁니다. 과장이 되어서 현장을 떠나 관리만 해야 한다면, 저는 차라리 과장이 되지 않겠습니다."
팀장님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만년 대리로 남겠다는 거예요?"
"네. 저는 책상머리에서 숫자만 맞추는 관리자보다, 현장에서 고객과 팀원들을 지키는 전문가로 남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이 일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팀장님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말리겠네요. 알겠어요. 유 대리님 뜻이 그렇다면... 존중할게요. 하지만 이번 승진은 장담 못 해요. 제 의견이 크게 반영되는 건 아시죠?"
"괜찮습니다. 각오했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승진은 물 건너갔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바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직급은 '계급장'이 아니라 '역할'일뿐이다.
나는 높은 사람이 되기보다, 깊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결국 그해 승진 발표에서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를 믿어주는 훌륭한 팀장님과, 나를 의지하는 든든한 사원들이 곁을 지키고 있다. 팀장과 사원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좋은 팀을 만드는 것.
그것이 '유현상 대리', 바로 나의 역할이다.
지금까지 '유현상 대리'의 20개 에피소드를 통해 그의 치열한 성장 과정을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 대리의 선택이 무조건적인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는 관리자가 되어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하고, 누군가는 유 대리처럼 실무자로 남아 현장을 지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정해놓은 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옷에 맞는 업무를 찾아내어 조직과 시너지를 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가장 훌륭한 팀원이자, 행복한 직장인이 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깊은 관심으로 끝까지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