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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상은 '규칙'으로 흐른다 (한지성 시선)

모호한 세상 속, 유일하게 선명한 사람

by 유블리안

[한지성]

나는 입고 상품 검수부서 사원 한지성이다. 사람들은 나를 '마음이.아픈 아이'이라고 부른다. 의사 선생님은 '발달장애'라고 했다. 나는 세상이 어렵다. 사람들의 말은 구름처럼 흐릿하고, 표정은 수수께끼 같다.

유현상 대리님은 다르다. 그는 나에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에게 '선명한 사람'이다.


오전 10시 00분. 나는 자리에 앉는다. 내 앞에는 박스가 3개 있다. 내 업무는 '스캔'이다. 바코드를 찾는다. 찍는다. '삑'. 화면에 숫자가 뜬다. 확인한다. 이 반복이 나는 좋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변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내 일이 지루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평화롭다. 유 대리님과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던 그날, 그가 정해준 '규칙'이 나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지성 씨. 10시부터 12시까지, 14시부터 16시까지는 스캔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지금은 업무 중입니다'라는 종이를 붙여 놓고 하던 일을 하세요. 나머지 시간에는 사무실 정리를 하거나 지성 씨가 하고 싶은 일을 하셔도 됩니다."


그전까지 나는 힘들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따가 이것 좀 도와줘", "적당히 하다가 쉬어"라고 말했다. '이따가'는 몇 시 몇 분인가? '적당히'는 몇 개인가? 나는 그 모호함이 무서웠다. 특히 나는 한 가지 일은 잘하지만, 일을 할 때 말을 걸거나 갑자기 다른 업무를 지시하면 머릿속에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나는 사장 아들이다!"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하고 모호한 말을 멈췄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나의 갑옷이었다. 하지만 유 대리님은 내 갑옷을 벗겼다. 그리고 대신 '매뉴얼'이라는 진짜 튼튼한 옷을 입혀주었다.


오후 2시. 다른 부서의 김 과장님이 검수실에 들어왔다. 목소리가 크다.


"어이, 한지성 씨! 여기 박스 좀 저쪽으로 옮겨 줄래? 내가 지금 바빠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 업무 매뉴얼에는 '박스 옮기기'가 없다. 하지만 거절하면 김 과장님이 화를 낼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배려'를 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회오리가 치기 시작했다. 그때, 유 대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 아니다. 기억이다.


"지성 씨. 지성 씨의 업무는 스캔입니다. 다른 업무 지시가 오면, 매뉴얼 3조 2항을 말하세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로봇처럼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업무는 스캔입니다. 그리고 2시부터 4시까지는 이 업무에 집중해야 합니다."


정적이 흘렀다. 무서웠다. 하지만 김 과장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아... 그래? 담당이 따로 있어? 알겠어." 김 과장님은 그냥 나갔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안전했다. '착한 척'을 하거나 '사장 아들 흉내'를 내지 않아도, '규칙'을 말하니까 사람들이 나를 존중해 주었다.


오후 5시 30분. 유 대리님이 검수실에 왔다. 그는 나에게 웃어주지 않는다. "힘들지 않았냐"라고 묻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내 모니터의 숫자를 본다.


"오늘 목표량 500개 중 500개 완료했군요. 오차는 0개입니다."

"네. 다 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한지성 씨, 내일도 이 속도로 진행합니다. 6시에 퇴근하세요."


스캔 이외의 시간에 사무실 정리를 하는 것,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부탁하는 소소한 업무를 돕는 것. 내가 할 일은 그게 끝이다. 다른 사람들은 유 대리님이 차갑다고 한다. "장애인 직원한테 너무 딱딱한 거 아니냐"라고 수군댄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나에게는 유 대리님의 그 '딱딱함'이 가장 부드러운 '안정감'이라는 것을. 그는 나를 불쌍하게 보지 않는다. 어린애 취급하지 않고 그저 '약속한 일을 해내는 직원'으로만 대한다. 나는 유 대리님이 가끔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는 내가 이 복잡하고 모호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유일하게 나를 잡아주는 안전벨트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도 출근하고 싶다. 규칙이 있는 이곳, 나는 이 회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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