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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는 관리자, 선을 잇는 해결사 (이선우 시선)

개인의 원칙과 조직의 위기가 충돌할 때 나는 무엇을 했나

by 유블리안
나는 1996년생 이선우. 일명 합리적인 MZ세대라 불리는 사나이.
나보다 2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유현상 대리님.
승진에는 밀렸지만 현장관리자로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베테랑이다.
나이차이를 뛰어넘은 진정한 나의 멘토이자, 오피스 아버지 같은 분이다..


​나는 '선(Line)'을 좋아한다.


출근은 10시, 퇴근은 19시. 내 업무는 '관리'지, '판매'나 '수리'가 아니다.


이 선을 명확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프로'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그 믿음이 백화점이라는 현장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것은 대학 경영학 전공 서적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사건은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금요일 18시 55분.


주말을 앞두고 백화점 매장은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무실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유현상 대리님 담당 브랜드의 '김미소 매니저'였다.


​"담당님! 지금 POS(계산기)가 먹통이에요! 고객님들 줄 서 계신데 결제가 안 돼요! 좀 내려와 주세요!"


​나는 시계를 봤다. 18시 55분.
나는 매뉴얼대로, 그리고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


"매니저님, POS 장애는 전산실 소관입니다. 그리고 저는 영업관리직이지 기계 수리공이 아닙니다. 전산실 당직 번호 알려드릴 테니 그쪽으로 접수하세요."
​"아니, 전산실은 전화를 안 받고... 담당님이 업무 대행자잖아요! 일단 와서 좀 봐주세요!"
​"죄송합니다. 제 업무 시간이 끝났습니다. 전산실에 계속 연락해 보세요."


매니저님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전화를 끊고 19시 정각에 퇴근했다. 매장은 20시 30분까지 영업하지만, 내 근로계약은 19시까지니까. 나는 내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사무실 분위기는 살벌했다. 알고 보니 어제 그 시간, 백화점 전산 오류로 결제가 30분간 마비됐고, 성난 고객들이 컴플레인을 걸며 일부 고객들은 구매를 포기하고 인근 다른 백화점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유현상 대리님이 휴무일인데도 뒤늦게 연락을 받고 집에서 달려 나와, 현장에서 고객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재무부서 협조를 받아 수기 결제로 사태를 수습했다는 것이다. ​유 대리님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그의 눈은 번아웃이 온 것처럼 퀭했지만, 눈빛과 목소리는 서늘했다.


​"이선우 씨. 매장에 불이 났는데, 내 담당 구역 아니라고 그냥 퇴근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내 업무 대행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대리님, POS 고치는 건 제 R&R이..."
"백화점 관리직의 R&R은 '현장'이 돌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유 대리님이 회의실 책상을 '탕'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고객이 줄 서 있는데 '전산실 전화하세요' 하고 퇴근해? 우리가 파는 건 물건이 아니라 '신용'입니다. 선우 씨가 19시에 칼퇴근하면서 지킨 그 '워라밸' 때문에, 우리 브랜드 매니저는 울었고 고객들은 우리 백화점을 욕하며 다른 경쟁 백화점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한마디 덧붙였다.


"일 잘하는 관리자는 책상 앞에서 '선' 긋는 사람이 아니에요. 비상시에는 그 선을 넘어서라도 현장을 지키고, 전산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라도 해결책을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선우 씨의 어제 그 행동은 관리자이기를 포기한 겁니다."


​관리자의 자격을 포기했다.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억울했고 내가 관리하는 브랜드도 아니지만, 유 대리님의 퀭한 얼굴을 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이어리를 폈다. 감정에 휩쓸려 자책만 하기는 싫었다. 유 대리님의 호된 질책과 애정 어린 조언에 나는 '셀프코칭'을 시작했다.


[Step 1. Goal (목표 설정)]


​Q: 내가 이 백화점에서 되고 싶은 '진짜 관리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A: 규정집만 읊는 행정병? 아니면, 현장 매니저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해결사?
(... 후자가 되고 싶다. 유 대리님처럼.)


[Step 2. Reality (현실 점검)]


​Q: 나의 '원칙(19시 퇴근)'이 백화점이라는 '현장'과 충돌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A: 나는 내 시간 10분을 아꼈지만, 회사는 매출과 신뢰를 잃었다. 백화점은 금~일은 20시 30분까지 돌아가는데, 관리자인 나만 19시에 정신적 셔터를 내렸다. 이건 '원칙'이 아니라 '직무 유기'에 가까웠다.


​[Step 3. Options (대안 탐색)]


​Q: 다시 금요일 18시 50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나?
​A: ​내가 못 고치더라도 일단 현장으로 뛰어 내려갔어야 했다. (고객들에게 "죄송합니다, 해결 중입니다"라고 관리자가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매니저는 힘을 얻는다.) ​내 선에서 해결이 안 되면, 전산실로 뛰어가거나 본사 전산실장에게라도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비상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휴무인 유 대리님에게 연락이 가지 않게 내가 어떻게든 처리했어야 했다.


[Step 4. Will (실행 의지)]


​Q: 앞으로 나는 어떤 원칙을 세울 것인가?
​A: '책상'이 아닌 '현장'을 기준으로 삼는다. 퇴근 시간이라도 현장에 문제가 생기면 외면하지 않는다. '내 일 아님'이라고 선 긋기 전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먼저 찾는다.


​다이어리를 덮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합리적인 MZ 사원'인 척했지만, 사실은 현장의 치열함을 모르는 '책상물림'에 불과했다.


​점심시간, 나는 옥상 정원에서 쉬고 계신 유 대리님을 찾아갔다.


"대리님. 커피 한잔 드시겠습니까?"


유 대리님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어제는... 제가 백화점 관리직의 본질을 몰랐습니다. 저는 규정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는데, 현장이 멈추면 규정도 소용없다는 걸 배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는 '선 긋는' 관리자가 아니라, 현장과 사무실을 연결하는 '선 잇는' 해결사가 되겠습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유 대리님이 캔커피를 받아 들며 피식 웃었다.


"이선우 씨. 멘탈이 생각보다 튼튼하네. 현장은 매일매일이 전쟁이니까. 그리고 신규 고객은 판촉 활동으로 끌어 모을 수는 있어도, 신뢰를 잃은 고객은 다시 되돌리기에는 몇 배의 비용과 손해가 발생한다는 것,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내 모니터에는 여전히 '업무 분장표'가 붙어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저 표는 내가 해야 할 일의 '한계'가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현장의 '최소한의 가이드'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유 대리님을 통해 진짜 '백화점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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