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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자로서의 무게 (오나래 팀장 시선)

유 대리는 '해결'했고, 나는 '숫자'를 매겨야 한다

by 유블리안

나는 팀장이다. 팀장은 전략을 짜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1년 중 가장 잔인한 계절인 겨울을 견뎌야 하는 사람이다. 내 모니터에는 우리 팀원들의 이름과 성과표가 있다.

[S, A, B, C, D.]


회사는 냉정하다. 누군가는 반드시 웃게 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울어야 하는 '상대평가' 시스템이다. 우리 팀에 배정된 'S'와 'A'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다. 내가 누군가를 올려주려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한다.

​나는 지난 몇 달간 '유현상 대리'를 지켜봤다.
그는 놀랍도록 성장했다. 얼마 전 터졌던 '김이수 주임'과 '이선우 사원'의 갈등을 시스템으로 중재해 냈을 때, 나는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최근 '발달장애'를 가진 한지성 씨의 문제까지 단호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유 대리는 훌륭한 '해결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 '경영자'는 아니다.



​"팀장님, 1차 고과 평정표 가져왔습니다."

유 대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에는 그가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팀장님, 김이수 주임은 이번에 태도가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신입 사원과의 협업 시스템도 잘 지키고 있고요. 'A'는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입 이선우 사원도요. 업무 보고가 아주 정확해졌습니다. 기대 이상입니다."

"아, 한지성 씨도 이제 제 몫을 합니다. 적어도 'B'는..."

​유 대리의 눈은 반짝였다. 그는 자신이 고생해서 가르친 팀원들 모두에게 '상'을 주고 싶어 했다. 그는 '노력'과 '과정'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눈빛을 차갑게 외면해야 했다.

​"유 대리님."

나는 펜을 들어 엑셀 화면을 가리켰다.

"김이수 주임이 태도가 좋아진 건 알아요. 그런데 '매출'은요? 전년 대비 성장했나요? 경쟁사 대비 점유율은요?"

​유 대리가 멈칫했다.
"... 그건 아직 보합세이긴 합니다만, 팀 분위기가..."

​"이선우 사원, 시스템 잘 지키죠. 그런데 그건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거잖아요. 남들보다 더 뛰어난 초과 달성이 있나요?"

​유 대리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가장 아픈 곳을 찔러야 했다.
"유 대리님. 우리 팀에 배정된 'A' 등급 이상 티켓은 딱 3장이에요. 유 대리님이 하나, 제가 하나... 그럼 딱 한 장 남아요. 그걸 김이수 주임에게 주면, 묵묵히 성과 낸 다른 대리급 직원은 'C'를 받아야 해요. 누굴 버릴 건가요?"

​유 대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처음으로 '평가'의 무게를 실감하는 듯했다.

​"유 대리님. 리더는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 동시에, 누구에게 빵을 더 주고 누구의 빵을 뺏을지 결정하는 사람이에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평가자에게 그건 '무책임'한 거예요. 언젠간 대리님도 평가를 하는 자리에. 있게 되겠죠. 그러면 이거 하나만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요."

​"김이수 주임에게 낮은 고과를 주는 건 저도 괴로워요. 하지만 팩트는 그가 실적을 못 냈다는 거예요. 이걸 포장해서 좋은 점수를 주면, 진짜 성과를 낸 사람들이 '역차별'을 받아요. 공정함은 '모두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성과대로 차등을 두는 것'이에요."

​나는 붉은색으로 김이수 주임의 칸에 등급을 매겼다. 유 대리는 그 붉은 글씨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그가 무거운 어깨로 회의실을 나갔다..​문이 닫히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맨 위에 있는 이름, '유현상'.

그의 평가 등급 칸에 'S(최우수)'를 입력했다..​사실 이 'S' 등급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 나는 어제 본부장실에서 1시간을 싸웠다. 다른 팀장들의 견제를 받아내며 내 몫의 고과를 깎아서라도 유 대리의 몫을 챙겼다. 그는 지난 몇 달간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나는 모니터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유 대리, 당신은 오늘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상사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언젠가 당신도 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 아닌 '숫자'로 가치를 매겨야 하는 이 끔찍한 고독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진... 이 악역은 내가 맡을게. 당신은 조금만 더, 사람을 믿는 리더로 남아줘.'

​나는 [평가 완료]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깜빡거렸다. 나의 전쟁도, 유 대리의 성장도,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때, 책상 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메신저 알림이었다.


​"팀장님,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팀장님의 깊은 뜻과 평가자는 그 어떤 감정과 친분은 배제하고 성과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것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은 아프지만 공정함에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화면을 내려보다가,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에서 멈칫했다.


​"김이수 주임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보상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역시 유현상.'


그는 내 가르침을 흡수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성과'로 평가하되 '사람'을 버리지는 않겠다는 그 고집이, 그가 나보다 더 좋은 리더가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답장 대신 휴대폰을 덮었다. 오늘만큼은 그에게 '엄격한 팀장'으로 남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퇴근하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내년의 유 대리가, 그리고 우리 팀이 벌써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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