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아닌 나의 '성장 로그'를 남기는 습관
2주간의 파란만장한 파견을 끝내고 복귀한 유현상 대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현실의 벽 앞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매출목표’와 ‘KPI 달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션이었다.
월초의 다짐은 늘 비슷했다.
“이번 달에는 정말 다르다.”
그리고 이번 달도 정말 달라지기는 했다. 다만 좋은 쪽이 아니라, 버티기 힘든 쪽으로 달라졌을 뿐이었다.
월 중순, 1차 실적 보고가 올라오는 날. 팀 채팅방에 한 줄씩 이름과 숫자가 찍혀 올라왔다.
“유현상 대리님, 이번 달 실적 달성률 52.3%입니다. 최재영 대리님 67.5%, 김영희 대리님 48.1%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채팅창에 마지막 한 줄이 떠올랐다.
“김영희 대리님하고 유현상 대리님은 회의실로 잠깐 들어오시죠.”
오나래 팀장은 두 사람만 따로 불렀다.
유 대리와 김 대리의 표정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기색이 어렸다. 실적표에서 이미 한 번 주저앉았는데, 그 결과가 전 직원이 보는 단체 대화방에 또렷하게 공개된 것이었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공기는 더 무거워졌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한 채 조용한 숨소리만 오갔다. 잠시 후, 오 팀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김영희 대리님. 지난 2주간 어떤 노력을 하셨죠? 50%도 못 했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리고 유 대리님은 파견 갔다 온 걸 핑계로 매출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남은 기간 동안 어떤 노력을 하실 건가요?”
김영희 대리가 먼저 터졌다.
“죄송합니다. 고객이 안 와서요. 상품권 사은행사도 못 하게 하고, 비용도 못 쓰게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팀장님께서 본사에 얘기해서 예산 좀 받아 주세요.”
오나래 팀장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아니, 매출이 안 나온 걸 저한테 뒤집어씌우시는 거예요? 본사 협의는 대리님이 직접 하셨어야죠.”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나이 차이, 직급 차이가 뒤섞인 공기가 회의실 안을 눌렀다. 그때까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유현상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잔여기간 동안 백화점 본사 영업기획팀과 협의해서 추가 마케팅 계획 한 번 잡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매출 달성률도 100%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오나래 팀장은 짧게 말했다.
“네, 잘 협의해 보세요.”
그 말은 겉으로는 짧은 질책처럼 들렸지만, 유 대리의 마음속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번역되었다.
‘저도 지금 점장님한테 매출 압박받고 있어요. 나도 불안하다고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유 대리는 팀장의 말 뒤에 숨은 이 자막을 혼자서 읽어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다만 티를 안 내고 버티고 계신 거였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좀 더 해보는 수밖에… 그렇지만 나도 힘든 건, 힘든 거야.’
회의실을 나온 김영희 대리와 유현상 대리는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 공원으로 향했다.
“실적이 안 나왔으니… 제가 못난 놈이죠, 영희 대리님.”
유현상이 억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뭐 할 말이 있겠어요. 유 대리님보다 더 못했는데.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이런 대접까지 받아야 하나 싶네요. 휴…”
바람이 옥상 난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의 어깨 위에는 숫자보다 더 무거운 ‘평가’라는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사실 숫자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큰 의미는 없었다. 지난달, 그리고 전년 실적이 너무 잘 나왔기 때문에
이번 달 목표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된 것뿐이었다.
숫자는 그저 “이만큼 해봅시다” 하고 던져진 기준선에 불과했지만, 그 기준선은 어느새 사람의 능력과 인생을 줄 세우는 자로 변해 있었다. 이번 달 목표가 무거운 것은 유현상과 김영희의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그저 ‘기대치’가 높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마음은 쉽게 납득해 주지 않았다. 왜 이들은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고 자책하고 있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이 회사의 거의 모든 평가 지표가 ‘달성률’ 하나로만 정리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뛰었는지, 시장 상황이 얼마나 얼어붙어 있는지, 고객의 지갑이 어디까지 닫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보고서 위에서 중요한 것은 빨간색이냐, 파란색이냐. 80% 위냐, 아래냐. 그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자존심 상하는 멘트를 더는 듣지 않기 위해 억울함도,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그냥 입 안에 삼켜 버렸다.
그럴수록 자존감은 실적 그래프보다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숫자는 그저 결과였는데, 언젠가부터 숫자가 ‘사람값’이 되었고, 실적표는 조용히 마음을 깎아내리는 흉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멘털 방어가 필요해졌다.
숫자가 마음을 후려칠 때, 백화점 현장 관리자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크게 나누어 보면, 매출목표 앞에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세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1. 회피형 – “어차피 안 되는 건데”라고 스스로를 빼는 태도
앞서 회의실에서 들렸던 말은 이런 종류였다. “고객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저는 모르겠어요. 본사도, 브랜드도 아무것도 안 해주잖아요. 평가에서 깔리면 뭐… 어쩔 수 없죠.”
겉으로는 체념처럼 들리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최선을 다했다. 시장 상황이 이 모양이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였지만, 이 태도가 길어지면 상황에 대한 주도권까지 함께 내려놓게 되었다. “어차피 안 되는 싸움”이라고 마음속에서 판정을 내려버리는 순간, 새로운 시도, 다른 동선 설계, 다른 브랜드 협업, 작은 이벤트 같은 것들은 시작조차 되지 못했다. 결국 상처는 덜 받는 것 같았지만, 미래의 가능성까지 함께 줄여 버리는 태도였다.
2. 분노 전가형 – 맞은 데 말고, 다른 데 가서 때리는 태도
두 번째 태도는, 맞은 자리에서 울지 못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화살을 쏘는 경우였다. 점포에서 받은 압박과 모욕감을 그대로 입점 브랜드 본사나 브랜드 매니저에게 쏟아붓는 방식이었다. 입점 브랜드 매니저들을 불러 세워 이렇게 몰아붙이곤 했다.
“한 달 동안 뭐 하셨길래 이 정도밖에 안 나왔습니까.”
“매니저님은 도대체 뭐 하신 거죠.”
“브랜드 본사에서는 뭘 지원해 주셨나요.”
“남은 기간 어떻게 할 건지, 오늘 안으로 계획 보고하세요.”
이렇게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잠깐은 속이 풀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브랜드 매니저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저 점포는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낙인이 찍혔다. 필요할 때 진짜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들을
오히려 멀어지게 만드는 셈이었다. 분노는 잠시 시원했지만, 관계와 신뢰를 조금씩 갉아먹는 독에 가까웠다.
함께 목표를 향해 뛰어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피하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3. 성장로그형 – “누구 탓보다, 앞으로의 나”를 먼저 꺼내는 태도
세 번째 태도는 현실적으로 가장 어렵지만, 가장 단단한 방향이었다. 억울한 마음이 올라와도 바로 누구 탓부터 꺼내지 않고, 먼저 이렇게 자문(自問) 해 보는 태도였다.
“그래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뭐지.”
“이번 위기를, 다음 달을 위한 데이터로 바꾸려면 뭘 기록해야 하지.”
팀장의 거친 멘트를 그대로 상처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정보로, 단서로 번역해 보려는 연습.
그리고 지금의 일방적인 질책을, “내가 일하는 방식 전체를 점검해 볼 기회”로 삼으려는 태도였다.
현실에서 이 성장로그형 태도를 유지하는 일은 참 어려웠다. 그래서 더더욱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했다.
그날 밤, 유현상 대리는 하루의 끝에 노트를 하나 꺼내 이렇게 적어 보기로 했다.
1. 오늘 잘한 행동 세 가지 적기
김영희 대리를 공원으로 불러 위로했다.
같이 혼이 난 뒤, 각자 자리로 돌아가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영희 대리를 옥상 공원으로 불러
서로의 서러움을 나누는 시간을 만들었다.
“우리가 못난 사람이 아니라, 지금 상황이 좀 못난 거겠죠.”
이런 말 한마디에도 사람은 버틸 힘을 얻었다.
파견이 끝났지만, 한지성 씨의 도움 요청에 잠깐 들러 함께 처리했다.
정식 업무는 끝났고 파견도 종료된 상황이었다. “이제 내 일만 잘하면 되지” 하고 돌아서도 되는 순간이었지만, 유 대리는 부탁을 무시하지 않았다. 당장 실적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함께 버티는 동료’에 대한 이미지는
언젠가 다른 형태의 신뢰로 돌아올 것 같았다.
달성률 극복을 위해 백화점 본사 영업기획팀 장 대리와 만나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책임을 떠넘기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어려움을 꺼내놓는 자리를 만들었다.
“우리 점포도 힘들지만, 본사도 요즘 상황 만만치 않죠.”
“이번 프로모션에서 제일 막히는 지점이 어디인지 같이 볼까요.”
유 대리는 “본사는 지원을 안 한다”라고 원망하는 대신, “어떻게 함께 풀어볼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대화를 이어갔다. 그 순간, 실적 압박의 화살은 서로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문제를 향한 질문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2. 오늘 배운 점 한 가지 적기
유 대리는 그날의 배움을 한 줄로 정리했다.
“매출 목표는 우리가 못나서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에 더 크게 주어진 것일 수 있다.”
이 문장은 현실을 미화하려는 주문이 아니었다. 억지 위로나 자기기만도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를 향한 칼날을 조금 무디게 만들어 다시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는 해석의 방향 전환에 가까웠다. 실적이 낮은 달은 “나는 안 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시간이 아니라, “기대치가 높아진 지금,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며칠 뒤, 변화가 찾아왔다. 백화점 본사 영업기획팀 장 대리는 유현상 대리가 담당하는 상품군에 한해서
특별 예산과 판촉 행사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실적이 안 나온다’는 원망 대신, ‘같이 풀어보자’는 제안을 건넨 결과였다. 그 결과, 중간 달성률 1위였던 최재영 대리를 제치고 유현상 대리는 최종 매출 1위, 달성률 102.5%라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이렇게 깔끔한 결말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예산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가 아니었다. 회피형으로 남을 것인지, 분노 전가형으로 관계를 갉아먹을 것인지, 아니면 성장로그형으로 오늘의 나를 차분히 기록해 나갈 것인지. 선택은 언제나 각자의 몫이었다.
꼭 매출 실적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의 업무는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로 주어진다. 성장 로그를 쓰기 시작하면, 초조함과 조급함은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보자”라는 작은 여유가 생긴다.
조직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팀워크였다. 한 사람이 삐걱대기 시작하면 결국 그 조직 전체가 흔들리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직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부터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붙들어 주어야 했다. 그날 밤, 유현상 대리는 성장 로그 맨 아래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실적은 흔들렸지만, 오늘의 나는 조금 덜 흔들리는 사람이 되었다.”
숫자는 회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하지만 성장 로그는 오롯이 각자의 인생에 남는 기록이었다.
매출목표는 회사가 정했지만, 그 목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선택할지는 언제나 나 자신의 몫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