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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즐기는 사람을 보았다(김이수 주임 시선)

화가 많은 컴플레인 고객을 내 편으로 만드는 법

by 유블리안


토요일 오후 두 시, 백화점은 늘 그랬듯이 붐비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유모차와 쇼핑백이 뒤엉켜 있었고, 식품관에서는 시식 줄이 에스컬레이터 쪽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나는 사은 행사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입사 10년 차, 이제는 ‘주임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중고참이 되었지만, 토요일 오후 두 시만큼은 아직도 마음속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쳐 두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한 번은 터질 시간이다.’


그 예감은 이상하게도 잘 맞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안내문을 정리하면서 ‘이번 프로모션은 해당 카드로 당일 30만 원 이상 결제하신 고객님께–’라는 멘트를 입 안에서 굴려 보고 있었다. 그 문장이 실제 고객을 향해 나가기도 전에, 뒤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먼저 공기를 갈랐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나는 여기 단골이라니까요!”


순식간에 사은 행사 데스크 쪽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중년 남성 한 사람이 영수증과 카드, 쿠폰을 한 손에 움켜쥔 채 데스크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사은품 받으려고 줄을 서있는 고객을 뒤로하고 자칫하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분위기였다. 뒤에 줄 서있는 고객도 기다리다가 같이 컴플레인을 제기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서 얼마를 썼는지 알아요? 올 때마다 선물도 사고, 카드도 쓰고, 사람도 데려오고… 그런데 이깟 사은품 하나를 이렇게 깎아내리듯 줍니까?”


그가 입 밖으로 내뱉는 '이깟 사은품'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내 가슴 쪽에 먼저 박혔다. 나는 매뉴얼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은 공감하고, 규정은 분명하게. CS 교육 때마다 들었던 문장이 10년째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고 있었다.


“고객님, 많이 불편하셨죠.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이번 행사는 해당 카드로 당일 30만 원 이상 결제하신 고객님에 한해서–”


내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걸 누가 다 외우고 다녀요? 그럼 올 때마다 문자라도 보내든가, 안내를 제대로 하든가 해야죠! 당신들이 설명을 제대로 안 해놓고,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합니까?”


‘당신들.’


그 단어 하나가 귀 안쪽에 묵직하게 떨어졌다. ‘당신’이라는 말이 제삼자에게는 존칭이지만, 이 순간 고객이 쓰는 ‘당신’은 싸움을 걸겠다는 말이었고, 상대를 깎아내리겠다는 말이었다.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아야 했다. 명찰에는 ‘김이수’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지만, 나는 그저 “당신들” 중 하나였다. 백화점이라는 간판 뒤에 서 있는, 얼굴만 바뀌면 누구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그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10년 동안 이런 장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익숙해지는 것과 괜찮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속에서는 억울함이 올라왔다. 사실 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 행사 기준도, 안내 문구도, 사은품 수량도 위에서 내려준 그대로였다. 하지만 고객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문제는 결국 ‘나’ 하나로 모여서 보였다.


나는 한 번 더 숨을 삼켰다. 울컥하는 마음보다 숨을 먼저 삼키는 법을, 지난 10년 동안 몸이 먼저 익혀 온 터였다. 바로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걸음걸이였다. 유현상 대리였다. 몇 주간 타 부서로 파견 갔다가 복귀한 사람. 파견 나가기 전에도, 돌아온 뒤에도 현장은 늘 “유 대리님, 이것 좀…”이라는 부름으로 그를 찾곤 했다.


나는 속으로 짧게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나 혼자 맞는 날은 아니구나.’ 유 대리는 사은 행사 데스크 앞에 서서, 나와 고객 사이 정확히 그 중간 지점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옆에 빈 테이블로 고객과 나를 데리고 이동했다. 기다리는 다음 고객을 위한 배려와 화가 난 고객을 안심시키는 효과를 동시에 노렸다.


“고객님, 많이 불편하셨죠? 제가 나머지 말씀 들어드릴 테니 이쪽으로 옮기시죠.”


그는 먼저 고객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대신, 오늘 가장 먼저 받은 감정부터 건드리는 쪽을 택했다.


“말씀을 들어 보니, 그동안 저희 백화점을 자주 이용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내가 충분하지 못해서 오히려 서운함과 불편함 느끼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고객의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조금 방향을 바꾸었다. ‘계속 화를 낼지, 들어볼지는 한 번 생각해 보겠다’ 정도의 표정이었다. 유 대리는 내 쪽으로 잠깐 눈길을 주었다. 그 짧은 시선만으로도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수 주임, 기준 다시 한번만 보자.’ 나는 행사 안내문과 시스템 화면을 빠르게 다시 확인했다. 규정상으로는, 그 고객은 이번 행사 대상이 아니었다.


“고객님, 우선 사실 관계부터 정확히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영수증 전체를 잠깐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유 대리는 말을 고를 때 끝을 세우지 않았다.

“안 됩니다”라는 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굳이 그 단어를 또 던지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잠시 뒤, 그는 조용히 정리해 말했다.


“고객님, 오늘 이용하신 금액과 내역을 보면 분명히 저희 입장에서도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다만 이번 프로모션의 기준이 ‘해당 카드로 당일 30만 원 이상 결제’로만 잡혀 있어서 시스템상 자동으로 대상자에서 제외된 상황입니다.”


고객의 입가가 다시 굳어졌다.


“그러니까 결국 못 준다는 거네요.”


나도 속으로 같이 움찔했다. 10년 동안 이런 대사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내려앉곤 했다. 이쯤 되면 대개 상황은 “규정상 안 됩니다” vs “그래서 난 억울합니다”의, 서로 상처만 남는 싸움으로 번져 가곤 했다. 하지만 유 대리는 그다음 문장을 조금 다르게 꿰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처럼 평소에도 자주 이용해 주셨던 고객님이라면, 이번 한 번은 저희가 내부 결재를 올려서 ‘사후 지급’ 방식으로라도 사은품을 드릴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드리지 못하지만, 제가 책임지고 윗분과 본사 해당팀에 이야기를 올려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고객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후 지급… 이라고요?”

“네. 오늘 기준으로 고객님의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이용 내역과 금액을 보고 드려서 추진해 보겠습니다. 결과를 제가 직접 안내드리겠습니다. 금액은 지금보다 조금 빠질 수는 있지만 오늘 느끼신 서운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참 만에, 고객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지는 것이 보였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 봅시다. 진짜로 연락 주셔야 돼요.”


그는 아직 완전히 화가 풀린 얼굴은 아니었지만, 처음의 폭발적인 분노와는 다른 표정으로 사은 행사 데스크를 떠났다. 나는 그 뒷모습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남겨진 것은 사은품 상자 몇 개와 안내문 몇 장, 그리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내 심장이었다. 고객이 떠난 뒤, 유 대리는 풀이 죽어있는 나를 한 번 돌아보았다.


“이수 주임, 아까 안내 멘트 정확하게 했어요. 오늘 건은 기준이 명확하지가 않아서 발생한 문제이지 본인 잘못이 아니니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고 잘 마무리하세요. 이 고객님 건은 제가 마무리할게요.”


그 한마디에, 내 안쪽에 웅크려 있던 자책감이 조금 뒤로 물러서는 느낌이 들었다.


“안 그래도 저 때문에 고객님이 많이 불편해하셨지 않았나 걱정되었어요. 제가 더 먼저 명확하게 설명을 드렸어야 했던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좀 들었는데 대리님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네요.”


내 말이 끝나자, 유 대리는 잠시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컴플레인은, 우리가 일부러 못해서 생기는 경우가 잘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은 행사 데스크 위의 안내문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대부분은, 오랫동안 조금씩 쌓여 있던 불편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뿐이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고객의 소리를 대신 받아내는 사람입니다.”


유대리는 나를 질책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따뜻한 미소로 나를 위해 애써 주었다. 그리고 10년 차에게도 성장할 것이 있고, 고쳐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에 나를 한 번 더 되돌아볼 수 있었다. 유 대리의 컴플레인 처리를 두고 어떤 사람은 아마 “다 퍼주면 뭐가 남느냐”라고 핀잔을 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배운 것은, 그 컴플레인 해결로 인해 고정 고객 한 분을 확보한 효과가 있다는 점이었다. 당장의 사은품 ‘비용’이라는 나무만 볼 것인지, ‘고객 확보’라는 큰 숲을 볼 것인지에 따라 평가는 전혀 다르게 갈릴 수 있을 것이다.


판촉은 말 그대로 판매 촉진이기 때문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 맞지만, 오히려 몇 만 원의 비용을 아끼려다 몇 천만 원의 매출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 대리는 더 이상 예전처럼 컴플레인을 겁내던 그런 직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는 긴장과 안도를 어느 정도는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유 대리에게 나는 배울 것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리님의 처리 방식이 100% 맞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객의 소리를 정면으로 받아내는 모습은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유 대리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요, 이수 주임. 사람마다 처리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는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 차라리 이렇게 피드백을 해 주고 우리 물건을 많이 사주는 고객이 고마운 거예요. 진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주위에 안 좋은 소문만 내고 조용히 빠져나가는 분들이에요.”


이 말을 듣고 나니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쳐 두었던 빨간 동그라미가 조금은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고객의 불만족한 소리는 터지겠지만, 그 소리를 견디는 나 역시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얼마 후, 그 고객은 상담실을 통해 유현상 대리의 응대에 대한 칭찬을 남겼다.


“처음에는 서운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공감해 주며 해결해 보려는 모습을 보면서 그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달래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텐데도 침착하게 응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꼭 무리해 가면서까지 사은품을 챙겨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사은품보다 더 큰 ‘진심’을 받은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앞으로는 기준을 더 명확히 세우고 혼동되지 않도록 안내를 잘해 주시겠다는 유현상 대리님의 그 약속은 꼭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김이수 주임은 상담실에서 올라온 이 내용을 사내 메신저로 확인하고 조용히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사은품 상자 몇 개와 함께 남았던 묵직한 마음의 후유증 위로, 작게나마 따뜻한 무언가가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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