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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나를 미워한다고 확신했다(김미소 시선)

빌런이었던 김미소 매니저의 뒤늦은 참회록

by 유블리안



[ 김미소]


나는 유현상 대리 담당 브랜드의 매니저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빌런'이었다. 앞에서는 웃으며 "네네네" 했지만, 뒤에서는 그를 '무능하다'라고 욕했고, 심지어 '접대' 루머까지 퍼뜨렸다. 그날, 나는 그에게 처참하게 '응징'당했다. 그날 이후, 나는 지옥을 살고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유현상 대리는 나를 증오한다고.


그날 이후, 그는 나를 철저하게 '데이터'로만 대했다.


"매니저님, 주간 보고서 제출해 주세요."
"매출 추이가 꺾였습니다. 원인 분석해서 가져오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1g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차갑고 건조했다. 나는 그 건조함이 무서웠다.


'두고 봐. 언젠가 꼬투리 하나만 잡혀 봐라. 아주 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그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일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백화점 매니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그분(일명 상진이)'께서 매장에 들이닥쳤다.


"야! XX, 이거 입고 나갔더니 피부가 뒤집어졌어! 당장 환불해 주고 치료비 내놔!"


구매한 지 6개월이나 지난 옷이었다. 세탁 흔적이 역력했다.


"고객님, 이건 세탁 부주의로 인한..."
"뭐? 내가 거짓말한다는 거야? 너 이름 뭐야! 내가 인터넷에 다 올리고 본사에 찌를 거야!"


고객은 카운터를 치며 고함을 질렀고, 매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덜덜 떨렸다. 무서웠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이 사실이 유 대리 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거다. 유 대리는 이 핑계로 나를 징계 줄 거야. 고객 응대 소홀로 경위서를 쓰게 하고, 결국 쫓아내겠지.'


나는 보고를 주저했다. 그 사이 고객은 내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당장 점장 오라 그래!"


그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유현상 대리였다. 그는 헝클어진 내 옷매무새와, 붉게 상기된 내 얼굴을 한 번 쓱 보더니, 곧장 고객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당신은 뭐야?"
"이 매장 책임자입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내 차례다. 그가 나를 비난하고 고객에게 사과하라고 닦달하겠지.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에게가 아니라, 고객에게.


"고객님. 지금 하시는 행동은 업무 방해 및 폭행 미수입니다."
"뭐? 이 건방진 XX가 어디서 고객이 얘기하는데 협박을 해? 너도 잘리고 싶어? 야구방망이 들고 와서 다 때려 부수어야 정신 차릴 거야?"
"이 상품, 전국에 5천 장 팔렸습니다. 소재 관련 컴플레인,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알레르기 반응 보일 만한 소재가 아닙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당한 컴플레인은 100번이라도 듣습니다. 하지만 저희 직원에게 소리 지르고 위협하는 건 못 참습니다. 야구 방망이로 뭘 어쩌신다고요? 지금 당장 나가시지 않으면, 이 CCTV 데이터 들고 경찰 부르겠습니다."


고객은 유 대리의 기세에 눌려 욕설과 함께 바닥에 보란 듯이 침을 뱉으며 도망치듯 나갔다.


상황 종료.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유 대리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관리 못 했다고 혼내겠지. 꼴좋다고 비웃겠지. 그래 뭐 이런 일 한두 번 당했나.'


"매니저님."


그가 불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처리를 못 해서..."
"많이 놀라셨죠?"
"... 네?"


고개를 들었다. 유 대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거기엔 경멸도, 복수심도 없었다.


"저 고객, 상습 블랙리스트에 있는 사람이에요. 매니저님 잘못 아닙니다. 매뉴얼대로 대응 잘하셨어요."


그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뽑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오후엔 창고에 들어가서, 쉬면서 진정 좀 하시고요."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대리님... 왜... 저를 도와주세요?"


내 입에서 멍청한 질문이 튀어 나갔다.


"제가 대리님 뒤에서 욕하고... 루머 퍼뜨리고... 그랬는데..."


그가 피식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건 지난번에 다 끝냈잖아요. 공적인 잘못은 그때 다 털었습니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지금 매니저님은 제 '적'이 아니라, 제가 보호해야 할 '파트너'이니까요. 그게 다죠. 뭐가 더 있을까요?"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를 미워했고, 그도 나를 미워할 거라 확신했다. 내 좁쌀만 한 그릇으로는 그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는 철저하게 '공(Work)'과 '사(Person)'를 구분하는 진짜 프로였다.
그의 '데이터'는 나를 공격하는 칼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방패였다.
그의 '무감정'은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공정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나는 캔커피를 꽉 쥐었다. 따뜻했다.
처음으로, 유 대리님을 향해 짓던 내 '가짜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퉁퉁 부은 눈으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알았다.
진짜 리더는, 자신을 욕한 사람마저도 위기 앞에서는 기꺼이 품어준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이었는지를.
내일부터는 '네네네' 하지 않을 것이다.
진짜 '내 일'을 할 것이다. 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라도.


다음 편 예고


지금까지 동료의 시선에서 유현상 대리를 바라본 에피소드를 공개했습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다시 유현상 대리의 시선으로 돌아와서 정치와 정의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으로 다루고 20화에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남은 에피소드도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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