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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끝판왕, 간부 사원의 덕목

성과를 내되, 사람을 잃지 않는 기술

by 유블리안


연말 인사 시즌이 다가왔다. 누구에게는 가장 잔인한 계절이며, 누구에게는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는 시즌이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야구 감독들은 흔히 리더십의 시험대를 '우승'으로 잡곤 한다. 오죽하면 감독직을 맡는 것을 '독이 든 성배'라고 표현하겠는가. 감독이라는 영예와 함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동시에 성과(우승)에 대한 압박과 결과에 대한 비난을 온몸으로 떠안아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유현상'.
이름 때문인지 나는 늘 '현상 유지'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과연 이번에도 현상 유지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인가.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인사팀에서는 연말 승진 심사 참고 자료로 '리더십 기술서' 제출을 요구했다. 실무 성과는 좋지만, 과연 팀을 이끌어 나갈 자격(Leadership)이 되는지를 판단하겠다는 뜻이었다.

[귀하가 생각하는 '간부(Manager)'의 핵심 역량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니터의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하얀 화면에 덩그러니 놓인 커서가 꼭 지금 내 머릿속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글짓기라 하였는데, 이제 와서 또 작문을 해야 하다니.

나는 지난 1년간의 기억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번아웃을 겪으며 무너졌던 나, 억울한 동료를 대신해 싸웠던 나, 그리고 팀원들과 부딪히며 깨달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마음속의 펜을 들고, 내가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진짜 간부의 덕목'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판단력(우선순위 감각)'이었다.
과거의 나는 모든 것을 다 잘하려다 무너졌었다. "다 해보자"는 말은 멋있지만, 현장에서는 재난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다.

"지금은 이걸 버리고, 이걸 살리자."

이것을 결정하는 힘이 간부의 뼈대다.

다음은 '책임감(방패를 드는 용기)'이었다.
이선우 씨의 실수 때가 생각났다. 공은 팀에게 돌리고, 칼날은 내가 받는 쪽. 실수의 보고서를 '비난'이 아닌 '원인 분석'으로 바꿔주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상사다.

그리고 '공정함(예측 가능한 기준)'.
한지성 씨와 일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사람들은 완벽한 결과보다 '일관된 룰'을 더 신뢰한다. 같은 상황에 같은 판단을 내리는 간부는 팀의 불안을 줄여준다.

• 소통력(말의 온도 조절): "왜"보다 "무엇을/어떻게"를 말하여 팀을 앞으로 보게 만드는 것.

• 사람을 보는 눈(성장 설계): 인력을 '부품'이 아니라 '성장 곡선'으로 보는 감각. 누가 막히고 있는지, 누가 과부하인지 읽어내는 눈.

• 용기(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모두가 고개 끄덕일 때 "리스크는요?"라고 말하여 사고(事故)를 막는 것.

• 겸손(학습하는 권위):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며 팀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

• 체력과 감정관리(안정된 기압): 나의 기분이 팀의 날씨가 되지 않도록,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보너스 덕목 하나를 추가했다.

"뒤에서 팀을 지키고, 앞에서 팀을 드러내는 습관."

이게 되는 간부는 오래 가게 되어있다. 성과도 내면서, 사람을 잃지 않은 채로 말이다.

작성을 마친 나는 맨 윗줄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 문장으로 결론을 지었다.

[간부란, 성과를 내되 사람을 잃지 않는 기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최종 제출 전 임시저장부터 눌렀고 나는 탕비실로 향했다.


그때, 오나래 팀장님이 탕비실로 들어오셨다.

"대리님, 기술서 다 쓰셨어요? 표정이 비장하네요."

"네, 팀장님. 쓰다 보니 제가 과연 이런 리더가 될 수 있을지 어깨가 무겁습니다."

커피를 들고 돌아온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팀장님의 시선은 이내 나의 모니터를 향했고 기술서를 쓱 보시더니 빙긋 웃으셨다.

"조직은 숫자로 굴러가지만, 그 숫자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죠. 대리님은 이미 그 답을 제대로 알고 있네요. 저도 유대리님께 배워야겠는걸요. 호호"

"저는 팀장님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하하하."


오 팀장님의 칭찬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제출' 버튼을 눌렀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원칙과 사람을 지키며 성과를 내는 진짜 '리더'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나서, 운명이 그 일의 성패를 어떻게 결정짓는지 담담하게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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