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이 충성심이라 믿는 시대에 던지는 '휴식'이라는 승부수
연말 승진 심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회사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흘렀다.
특히 나와 함께 가장 유력한 과장 승진 후보로 거론되는 옆 팀 '강 대리'의 행보는 눈물겨웠다.
강 대리의 팀은 매일 밤 10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는 팀원들을 독려하며 "이번 달만 고생하자", "우리의 열정을 보여주자"라고 외쳤다. 임원들이 퇴근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강 대리가 생각하는 '승진 준비'였다.
문제는 우리 팀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갈등과 성장을 거치며 단단해진 우리 팀원들(김이수, 이선우, 한지성)조차, 승진 시즌의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대리님, 저희도 뭐... 남아서 스터디라도 할까요?"
김이수 주임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제가 남아서 내일 업무 미리 당겨 놓겠습니다."
이선우 사원도 퇴근 가방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최근 이어진 프로젝트들로 이미 다들 지쳐 있었다. 하지만 내가 승진 대상자라는 이유로, 그들은 '쉬고 싶다'는 말을 삼키고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갈등했다.
나도 사람이기에 불안했다. 옆 팀은 불이 켜져 있는데 우리 팀만 6시에 '칼퇴'를 하면, 임원들 눈에 '기강 해이'나 '열정 부족'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과거에 겪었던 나의 지독한 '번아웃'을 기억했다. 그리고 얼마 전 승진 심사 서류에 내가 직접 적었던 '간부의 자격'을 떠올렸다.
'성과를 내되, 사람을 잃지 않는 기술.'
지친 팀원들을 잡아두고 억지로 앉혀놓는 것은, 내가 그토록 경멸했던 '보여주기식 정치'와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주목해 주세요. 오늘부터 우리 팀은 '자율 휴식 집중 기간'에 들어갑니다."
팀원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할 일을 다 끝낸 사람'은 내 눈치 보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고 조용히 사라지십시오. 야근은 '열정'이 아니라 '능력 부족'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저도 제 할 일 끝나면 바로 갑니다."
그날부터 우리 팀은 6시 10분이면 텅 비었다.
강 대리가 지나가며 비꼬았다.
"유 대리, 배짱 좋네? 승진 포기했어? 사무실이 이렇게 썰렁해서야 원."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텅 빈 사무실을 뒤로하고 퇴근할 때마다 등 뒤가 서늘했다. 오나래 팀장님이나 임원들이 이 텅 빈자리를 보고 나를 평가절하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자율'의 힘은 일주일 뒤부터 나타났다.
강 대리 팀원들은 아침마다 좀비처럼 출근했다. 오전 내내 멍하게 있다가 오후 늦게야 업무 속도가 났다. 야근을 해야 하니 낮에 에너지를 아끼는 악순환이었다.
반면, 푹 쉬고 온 우리 팀원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한지성 씨는 오전 집중 근무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데이터를 처리했다.
이선우 사원은 "어제 푹 쉬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획기적인 기획안을 가져왔다.
김이수 주임은 "일찍 가려니까 집중력이 저절로 생긴다"며 업무 프로세스를 단축했다.
결과는 숫자로 증명되었다.
주간 업무 보고 회의 시간. 강 대리 팀은 '야근 시간'은 1위였지만, 실적은 제자리였다. 반면 우리 팀은 '초과 근무 0시간'이었지만, 목표 달성률은 120%를 찍었다.
오나래 팀장님이 회의실에서 웃으며 말했다.
"2 팀은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효율이 좀 떨어지네요. 반면에 우리 팀은... 사무실이 비어 있는데도 실적은 꽉 차 있네요? 비결이 뭐죠?"
나는 강 대리와 팀원들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팀원들을 믿었습니다. 관리자의 역할은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팀원들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일할 수 있게 '시간'을 돌려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팀원들이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들의 표정에는 피로 대신 '자부심'이 가득했다.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승진 준비는,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도 팀이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리더가 팀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지는 '회식'이 아니라 '자율적인 휴식'이었다.
"리더의 진짜 능력은 '불 켜진 사무실'이 아니라, '빛나는 팀원들의 눈빛'에서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