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비행기를 타고 갔던 나라가 영국이었다. 어학연수차 갔던 런던에서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라는 걸 알았다. 세계 여러 나라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영국의 오래되고 멋진 건축물을 보고, 수많은 박물관을 오가며 교과서 속 세상을 직접 내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여행은 내 삶에서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전세계 20여 개국, 100개의 도시를 여행하며 나만의 삶을 채워나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버킷리스트를 완성하게 되었다.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모로코 사하라 사막. 정말 가고 싶었던 세 곳을 모두 다녀온 후, 갑자기 제주로 이주하게 되었고, 나는 1년 동안 여행 생각조차 나지 않을만큼 완전히 제주 생활에 푹 빠져 살았다.
제주 살이 1년쯤 지나고 나니 이제 슬슬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버킷리스트 3곳을 다녀온 후 관광으로 잠시 다녀오는 여행은 이미 식상해져버렸다. 특히 3박 4일짜리 여행은 애초에 내 취향은 아니었다. 발도장만 꽝꽝 찍고 오는 건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동안의 여행을 통해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최소 2주는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뭔가 조금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
다행인 건지 20대에 유럽 배낭여행에서 여기저기 시간에 쫓기듯 많은 곳들을 다녀서인지 이제 그런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한 곳에 좀더 오래 머물고, 좀더 즐기듯 느긋이 그곳을 온전히 느끼는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어느 날, 내가 사는 제주에 산티아고 카페가 생겼다.
'산티아고'란 이름만 봐도 난 설레었으니까. 난 대뜸 카페 사장님께 산티아고 순례길 다녀오셨냐고 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다녀온 사람들은 이상한 동지애 같은 게 있다. 그래서 만나면 더 반갑다) 그런데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고 싶어서 이런 카페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내가 준 정보를 발판 삼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귀국 후 그의 카페 벽면에는 산티아고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순례자 여권, 완주 증명서, 배낭을 멘 자신의 뒷모습.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어떤 사람에게 여행은 '자랑'이구나.
SNS를 보면 더 분명히 볼 수 있다. 수많은 이들의 에펠탑 앞 인증샷, 일본의 유명한 라멘집 줄서기, 유명한 카페 방문기. 그 모든 것이 결국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자랑하기 위한 여행 아닌가. 과연 그게 진짜 자신을 위한 여행일까.
그러다 언젠가부터 제주에 '한 달 살기'를 시작으로 해외 한달살이 열풍이 불었다. 나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본 적이 있었다. 운이 좋아서 현지인들과 함께 사는 한 달을 보냈다. 그들의 부엌에서 밥을 먹고, 그들의 일상을 함께 나눴다. 그런데 SNS에 올라온 한 달 살기는 달랐다.
거주지만 치앙마이일 뿐, 태국 사람도 태국 문화도 없었다.
로컬에 스며든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곳만 옮긴 거였다.
태국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는 한 달 살기.
광고도 하던데,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고. 그런데 그 누구도 정작 진짜 살아보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나는 남들과 다른 진짜 살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제주에서 1년 동안 살면서 관광객으로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주 로컬들과 함께 살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귤꽃 향기가 짙어지는 오월의 공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시고, 옆집 삼춘이 돌담 너머 무심하게 건네준 호박 하나에 마음이 따뜻해지던 순간들. 계절의 변화와 제철 식재료, 그리고 사람들의 문화 속에 깊숙이 스며드는 진짜 일상 생활의 감각들.
그 경험을 다른 곳에서도 해보고 싶었다. 관광객이 아니라 잠시라도 그곳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
나는 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