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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빠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어릴 때, 새 학년이 되면 아빠는 학교 선생님들께 식사 대접을 하셨다. "우리 딸 잘 부탁합니다." 분명 그런 의미였을거다.


아빠는 지병 때문에 종종 병원에 입원하신다. 몇 년 전, 아빠가 입원하셨을 때가 마침 천혜향을 따는 시즌이었다. 동네 아는 삼춘 귤밭에 천혜향을 따러 갔는데 귤밭 삼춘이 부모님께 보내드리라고 좋은 천혜향 한 박스를 선물로 주셨다.


천혜향은 제주에서는 흔한 귤이지만, 육지 사람들에게는 그리 흔하지 않은 귀한 귤이다. 특히 천혜향이나 황금향 같은 귤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천혜향을 아빠가 입원한 병원에 보내기로 했다. 천혜향 상자안에 손편지를 써서 넣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였다. "우리 아빠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중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천혜향 받았다. 고맙다." 아빠의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아빠가 누군가에게 "우리 딸 잘 부탁합니다"라고 했을 때는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에게 "우리 아빠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건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부모가 늙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어서 였을까?


얼마 전 황금향 귤밭에서 귤을 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귤밭 주인 언니가 말했다. "아주 큰 황금향은 요양원에 보내야겠어." 언니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신다. 거기서는 어른들이 먹기 좋게 귤을 잘라서 식사 때 디저트로 주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큰 귤이 자르기 쉽고 환자들이 먹기도 쉬우니까, 제일 큰 황금향으로 보내겠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귤밭 언니도 몇년 전 내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우리 엄마, 잘 부탁합니다."


황금향을 요양원으로 보내며 엄마를 부탁하는 언니. 천혜향을 병원으로 보내며 아빠를 부탁하는 나.


제주에서 흔한 귤이, 우리에게는 가장 정성스럽게 전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이제 누군가에게 부모를 부탁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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