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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풍요의 지혜, 장아찌

육지에 살 때는 장아찌를 그리 많이 먹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제주에 살면서 유독 장아찌를 자주 먹게 된다. 양파 장아찌, 풋마늘 장아찌, 무말랭이 장아찌, 갓 장아찌, 콩잎 장아찌... 종류도 다양하다.


제주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때, J언니가 만들어 놓은 마늘 장아찌를 처음 먹어보았다. 왠지 아린 맛이 날것 같아 육지에서 쳐다도 보지 않았던 그 마늘 장아찌가 아삭거림과 함께 그렇게 맛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후로 J언니가 만들어준 토마토 장아찌 또한 정말 별미였다.


언젠가 고마운 제주사람1이 텃밭에 고추가 많이 열렸다면서 고추를 한가득 담아 줬다. 나는 그걸 가지고 J언니에게 갔다. J언니는 그 많은 고추를 보더니 고추장아찌 담으면 되겠다고 한다. 지난번 언니가 만들어줬던 마늘 장아찌가 너무 맛있어서 오일장에서 마늘도 사와야겠다고 했더니 언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키라야, 장아찌는 돈 주고 재료를 사서 만드는 게 아니고, 재료가 너무 많아서 버릴 수도 없고, 바로 먹을 수도 없을 때 만드는 거야."


그때 알았다. 장아찌 담는 재료를 일부러 사서 담는 건 아니라는 것을. 물론 각자의 이유로 재료를 사서 담는 사람도 있겠지만 J언니의 장아찌에 대한 생각이 내겐 꽤 신선했다.


이 시골에는 유독 재료가 넘칠 때가 많다. 밭에서 무언가를 얻으면 혼자 먹기 힘든 양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럴 때 주변 이웃들과 나눠 먹기도 하지만, 장아찌를 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 종종 가는 식당에서 반찬으로 단감 장아찌가 나왔다. "이게 뭐야? 설마 단감???" 너무 신기하고 맛있어서 사장님께 이거 단감 맞냐고 확인까지 했다. 그때 사장님이 집에 감나무가 있는데 단감이 너무 많이 열려서 장아찌 만들어봤다고 하는거다. 오래전 J언니가 내게 했던 그 말이 바로 떠올랐다. 아, J언니가 이야기했던 게 이런 의미였구나......


장아찌는 단순히 음식을 보존하는 기술이 아니라 '넘치는 풍요'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시간을 들여 보존하는 시골의 지혜였던 거다.


나는 밥상 위 장아찌를 보며 생각해본다. 인생에서 넘치는 것들, 이를테면 이웃에게서 받은 고마움과 자연이 내어준 풍요를 소중히 간직하고, 허투루 쓰지 않는 법을 말이다. 이 작은 반찬 하나가 내게 알려준 건,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오래도록 함께 하는 시골의 삶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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