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면 육지에 사는 부모님 집에는 쌀가마니가 하나둘 쌓이기 시작한다. 주변에 다들 벼농사를 짓는 이웃들과 함께 살다 보니 추수가 끝날 때쯤이면 이웃들이 농사지은 쌀을 한 가마니씩 가져다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엄마 아빠가 사는 집 창고에는 쌀이 한가득이다. 수십 개의 쌀가마니를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정미소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겨울이 되면 제주에 사는 우리 집에는 귤이 쌓이기 시작한다. 육지와 달리 내가 사는 이곳은 주변에 다들 귤농부들이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귤을 가져다 주신다. 너무 많아서 대부분 육지에 있는 가족들에게 택배로 보내드린다.
육지에서 흔한 쌀, 제주에서 흔한 귤.
얼마 전 아빠가 전화하셨다. "귤 좀 사서 보내줄래? 쌀 주신 분들에게 선물하려고." 쌀을 받았으니 귤로 답례하시겠다는 거다. 그래서 누구네 귤을 사서 보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필 귤을 사서 보내려고 알아보던 참에 귤농부 지인과 밥을 먹게 됐다. "혹시 귤 필요하면 우리 밭에서 따서 육지 가족들한테 보내줘." 귤농부 지인은 올해 귤에 저장약을 하지 못해서 상품으로는 팔 수 없다고 했다. 보통 귤의 보관과 저장 기간을 늘리기 위해 귤에 저장약을 뿌리는데 그 약을 하지 못했다는 거다. 오래 저장해놓고 먹지 않으면 괜찮다며 밭에 와서 따가라는 거다. 멀쩡한 귤인데 따지 않으면 결국 버려지는 귤인거였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제주에서는 쌀농사가 안 되니 쌀을 사 먹는다. "그럼 우리 쌀이랑 귤 맞바꿀까?" 귤농부 지인도 좋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쌀이 똑 떨어져서 이번 주에 사러 가려고 했다면서.
엄마한테 연락해서 쌀을 보내달라고 했다. 귤과 맞바꾸기로 했다고. 귤밭에 가서 귤을 땄다. '아이고, 이 많은 귤들을 다 어쩐담?' 모양은 좀 예쁘지 않지만 달고 맛있는 귤이다. 그렇게 귤을 육지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쌀 주신 분들께 전해드리라며.
평소에 나는 이렇게 귤을 주신 이웃들에게 육지에서 엄마가 보내준 김이나 매생이를 나눠드리곤 했다. 육지에서 흔한 것이 제주에선 귀하고, 제주에서 흔한 것이 육지에선 귀하니까. 부모님도 좋아하셨고, 귤농부 지인도 좋아했다. 나 역시 뿌듯했다. 쌀 한 포대와 귤 몇 상자.
서로에게 필요한 걸 나누는 삶. 이게 진짜 풍요로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