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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맛, 분홍 소세지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마트에 가면 분홍 소세지를 종종 장바구니에 넣는다. 왜 사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사람들마다 유독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하나씩 있을 텐데, 내겐 분홍 소세지가 그렇다.


사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분홍 소세지가 좋다. 어릴 때 늘 도시락 반찬으로 싸 가던 노란 계란 옷을 입은 분홍 소세지. 특히 외갓집 제사 때 가면 먹는 분홍 소세지 전이 제일 맛있다. 똑같은 분홍 소세지인데도 신기하게도 외갓집 분홍 소세지는 차가워도 맛있다.


언젠가 햄이 등장하면서 분홍 소세지가 밀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분홍 소세지를 좋아한다. 특히 스트레스 받거나 마음이 불편할 때 이상하게 난 분홍 소세지를 꼭 먹게 되더라. 그럼 뭔가 따뜻해진 기분이거든.


어느 날 동네 이웃들이랑 저녁을 먹는데 이웃 중 한 명이 분홍 소세지를 보고는 "분홍 소세지는 가난한 맛"이라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가난한 맛의 음식이라면서. 하하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자신의 아버지가 분홍 소세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거라고 했다면서.


황당했다. 처음엔 어떻게 음식에게 가난하다고 할 수 있나 싶었다. 세상에 가난한 맛이 어딨어? 그럼 부유한 맛도 있는 거냐?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가끔 "마음이 가난하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그래서 가난한 맛이라 표현하는 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아주 부유하게 자랐다. 그래서 내게 분홍 소세지는 가난한 맛이 아니다. 그저 내게 분홍 소세지는 어릴 적 기억의 음식이다. 사실 특별한 추억도 없다. 어디서나 이 분홍소세지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올해 일본 홋카이도에 갔을 때 일본 마트에서 분홍 소세지를 발견했다. 일본 가족들에게 김밥을 싸주려고 햄을 사러 갔는데 한국 같은 햄이 없는 거다. 그런데 일본에도 분홍 소세지가 있더라. 정말 신기하게. 우리나라 분홍 소세지보다 훨씬 작고 가는 분홍 소세지였다. 똑같은 분홍색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가난한 맛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맛이다. 음식의 의미는 각자 다른 거니까. 어떤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가난의 상징이어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행복이 될수 있다.


오늘도 나는 분홍 소세지를 산다. 사실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는 거잖아. 그저 존재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런 맛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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