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오스트리아의 한 기차역 건물 로비 한가운데에 혜진이 서 있었다. 한가한 오전, 움직이는 사람들 속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 옆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 세 개가 덩그러니 있었다. 혜진은 가방에 달린 바퀴를 보고 있었다. 허연 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조그만 바퀴는 많이 닳아 있었다. 잠시 뒤 누군가 혜진의 뒤로 걸어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찐아! 오빠가 미안하다고, 좋은 데로 바로 예약했대.”
미희였다.
“뭐가 미안해. 그럴 수도 있지…”
혜진이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희의 사촌 오빠는 한국의 대형 여행사에서 일했다. 사촌 동생이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간다고 신경 써서 예약을 해주었는데, 중간에 문제가 있었다. 직원의 착오로 프라하 호텔 예약이 엉켰고, 친구들은 나흘 동안 숙소를 매일 옮겨야 했다. 오빠는 미안하다며 다음 나라에선 좋은 호텔에서 길게 쉬게 해 주겠다고 했다.
“엇, 저기 온다.”
혜진과 미희는 건물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주연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셋은 가방을 하나씩 끌고 역 밖으로 나갔다. 하얀 돌길 위로 빈약한 플라스틱 바퀴가 달가닥거리며 굴러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호텔은… 다 좋은 거 아닌가?’
묵직한 가방 손잡이를 끌며 혜진은 좋은 호텔은 대체 뭐가 좋은 걸까 상상했다.
“이 길 맞아?”
조그만 표지판 앞에 선 주연이 둘을 향해 물었다.
“맞는 것 같아.”
“근데 여기 왜 이렇게 조용하냐…”
역 근처를 벗어난 후 건물들 사이로 걸어오며, 셋은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양옆으로 흰색의 오래된 집들이 차분히 이어졌지만, 골목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돌길 위를 구르는 가방의 바퀴 소리와 셋의 작은 목소리 뿐이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여기 유럽이 아니라 한국 같아. 우리 동네 골목.”
“맞아, 맞아.”
셋이 키득거렸다. 골목을 벗어나자 깔끔한 인도가 넓게 펼쳐졌다. 길 건너 호텔의 정문이 보였다. 차도엔 차가 한 대도 없었기에 셋은 서둘러 길을 건넜다. 검은 철문을 통과할 때 주연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와……”
혜진과 미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흰 대리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다.
“와… 여기 호텔 맞아? 유적지 아니야?”
멋진 성처럼 생긴 호텔 외관을 보고, 셋은 여기가 아주 오래된 유적지인가 생각했다. 건물을 향해 뻗은 넓은 길 위는 하얀 작은 돌들로 덮여 있었다. 여행 가방을 끌며 걷자, 바퀴 자국을 따라 뽀얗고 고운 먼지가 피어올랐다.
“저 옆이랑 뒤에까지 전부 호텔인가 봐.”
건물 왼편으로 정원이 보였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매끈히 다듬은 초록 나무들이 끝없이 보였다. 셋은 호텔 정문에 다다랐다. 정문은 매우 넓었다. 출입구가 족히 열 개는 되어 보였다. 짙은 색 유리문을 등으로 밀며 천천히 들어가자, 안에서 직원이 걸어 나와 문을 잡아 주었다.
[“헬로.”]
[“헬… 헬로…”]
직원의 인사에 미희가 서툴게 대답했다. 주연이 말했다.
“헬, 헬로가 뭐야? 지옥 같은 헬로야?”
“히히…”
셋이 키득거리며 차례차례 로비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두툼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그들을 따라오던 먼지와 소음은 말끔히 사라졌다. 숨을 들이쉬자 시원한 공기가 가슴을 채웠다. 드러난 팔다리의 열기가 사라지고 온몸이 보송해졌다. 부드러운 향기가 났다. 가녀린 음악 소리도 함께였다. 이곳은 바깥과는 다른 세상 같았다. 정면에 있던 프런트에는 단정한 차림의 직원들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프런트 양쪽에는 섬세한 금빛 조각이 달린 베이지색의 고급 소파들이 동그란 탁자를 두고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에 가방을 모아두고 주연과 미희가 프런트로 걸어갔다. 이번 체크인은 주연과 미희의 차례였다. 호텔에 갈 때마다 영어로 체크인을 하니 머리와 입과 손짓, 발짓을 총동원해야 했다. 처음에는 서툰 영어를 써보는 것이 재미있었지만 서서히 셋은 피곤해졌고, 이젠 두 명씩 돌아가면서 체크인하기로 했다. 이번엔 혜진이 쉬는 차례였다. 혜진은 프런트 양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복도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복도 끝까지 넓은 벽 위에 큰 명화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며칠 동안 박물관을 구경하더니 이제는 박물관에서 잠도 자보는구나.’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혜진은 텅 빈 호텔 로비 한가운데, 어깨에는 크로스백을 단단히 메고, 손에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 여행 가방 세 개를 지키며 혼자 우뚝 서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별 대단치도 않은 봇짐 더미를 누가 훔쳐 갈까 혼자 겁먹고는, 모자란 손으로 둘레둘레 엮어 꼭 붙들어 쥐고 있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정작 이 로비에서 이 가방을 보는 이는 벽에 걸린 저 그림들 속 인물들뿐인데.
‘좀 쉬어야지. 이번엔 많이 돌아다니지 말아야겠다.’
하얀 먼지로 덮인 자신의 검은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혜진은 생각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걸어오는 주연과 미희가 성공했다는 미소를 짓자, 혜진도 미소를 지었다. 셋은 객실로 향했다. 여행 내내 셋은 한 방을 썼다. 여행사에선 두 명당 한 방을 배정해 주기 때문에 방 하나를 더 예약해 주겠다고 했지만, 셋 다 혼자 자는 것이 무서울 것 같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와 보니 잘한 결정이었다. 늦은 밤, 한 방에 모여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이른 새벽에는 서로를 깨워주는 재미가 있었다. 셋 중 한 명이 번갈아 간이침대에서 자야 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셋이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와, 좋다.”
확실히 이전 호텔들과는 인테리어부터 달랐다. 작지만 깨끗하고 심플한 호텔에서만 묵었던 그들은 방 안을 가득 채운 화려한 가구들을 보고 감탄했다.
“여기 화장대 되게 예쁘다…”
빛나는 금색 테두리를 두른 커다란 거울을 본 주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내 꼴 좀 봐. 빨리 씻어야겠다. 와, 이거 너무 귀여워.”
주연이 거울 밑에 있던 한 쌍의 조그만 황금색 새 모형을 들어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가방을 정리하던 미희가 말했다.
“내려놓으세요. 깨지면 안 돼요.”
“네.”
주연이 새 모형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주연은 황금 거울 아래에 놓인, 베이지색 바탕에 하늘색으로 섬세한 그림이 그려진 묵직한 화장대 서랍을 천천히 열었다.
“비어 있어. 여기 물건 넣어도 되나 봐.”
“오… 부담스러워.”
혜진이 말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부드러운 크림색과 상큼한 민트색이 칠해진 커다란 메인 침대가 주인공처럼 누워있었다. 침대 헤드 꼭대기에도 금색으로 칠한 작은 새 조각품이 붙어 있었다. 혜진이 새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미희가 혜진에게 물었다.
“왜? 거기서 자고 싶어?”
“아니.”
혜진이 창문 옆에 있던 간이침대를 보았다. 이번엔 그녀가 간이침대를 쓰는 차례였다.
“좋은 호텔은 간이침대도 좋네.”
혜진이 간이침대 위에 앉았다. 보기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메인 침대만큼 좋진 않았지만, 커다란 창문 옆이라 왠지 분위기가 있었다.
“와, 침대 크다. 여기 너무 좋다.”
“주연아, 안돼! 옷 안 갈아입었으면 침대 접근 금지야!”
“넵.”
미희한테 혼난 주연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혜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반듯하게 다듬은 초록 나무들이 줄지어 선 넓은 정원이 보였다.
‘왠지 놀이공원에서 자는 것 같네. 외풍은 없으려나?’
늦은 여름이라 날씨는 좋았지만, 유럽의 호텔들은 밤에 왠지 외풍이 있는 것 같았다. 혜진은 창문 가에 손을 대고 바람이 들어오는지 느껴 보았다. 차가운 기운은 없었다. 대신, 바깥공기의 신선한 냄새가 혜진의 코안으로 스며들었다.
‘뭐, 아예 없을 순 없겠지.’
호텔 창밖으로 파란 하늘 아래 넓은 정원과 그 너머 펼쳐진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보였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유럽의 도시였다. 너무 아름다우면서도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혜진은 저 멀리 건물 사이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며, 저 안에 탄 사람들의 일상은 어떨지 상상했다.
‘저 예쁜 학교에 다니고, 저 예쁜 시청에 가서 서류를 만들고, 예쁜 도로를 따라 예쁜 집에 가겠지?’
생각하던 혜진이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창문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본 것이었다.
‘이 장면에 겹치는 동양인 얼굴… 너무 안 어울리는걸? 히히히.’
그래도 좋았다. 신기하고 재밌는 여행이었다. 돈 모아 셋이 함께 유럽 여행을 가보자고 말은 했었지만, 진짜 이날이 올 줄은 몰랐다. 모두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생각하면, 혜진은 자신과 친구들이 대견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지금까지 돈을 얼마나 모았냐 물으며 셋이 문자를 주고받던 밤들, 그리고 미희의 사촌오빠를 만나러 셋이 종로에서 모였던 날이 떠올랐다.
‘아르바이트는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없었으면 이런 세상 구경도 못 해봤겠지.’
여행을 온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갔다. 이것은 친구들과 온 첫 장기 여행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혜진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미래나 공부에 대한 걱정 없이 그저 소비만 하면 되는 여유와 하루 종일 아름다운 것만 봐도 되는 정제된 경험, 그리고 오롯이 내 생각과 감정만을 묻는 자신과의 대화로 가득 찬 날들이 이어졌다. 혜진은 서서히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정말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안갯속에서 비로소 내 형태를 발견한 기분, ‘나’로 21년을 살았지만,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겨우 알게 된 기분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이런 감정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혜진은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점점 상쾌해지는 마음은 여행 덕에 신이 났기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혜진이 자신 속에 숨어있던 진짜 혜진을 발견하게 되면서 얻은 내면의 명쾌함이었다.
“공원에 갈 거지?”
미희가 지도를 보며 말했다. 이 호텔 근처에는 유명한 공원이 있었다. 이번엔 그곳에만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여행하는 동안 너무 힘들었다. 너무 많이 걸었고, 너무 많이 헤맸고, 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짐 정리를 하면서 셋은 공원이 꽤 넓다고 하니 좀 쉬엄쉬엄 다니자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창밖의 햇살이 부드러워졌을 때, 셋은 밖으로 나갔다. 호텔에도 길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공원으로 가는 길은 건물들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야 해서 복잡한 편이었지만, 고개를 드는 곳마다 보이는 작은 표지판이 셋에게 조용히 방향을 알려 주었다. 주연이 웃으며 말했다.
“야, 저기 문이랑 창문이랑 너 자취방이랑 똑같아. 여기 복담동 아니야?”
셋이 키득거렸다.
“똑같아. 복담동 유럽 스타일이었네.”
“사진 좀 찍어줘. 복담동 다녀왔다고 보여줘야지.”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걷고 또 걸어, 셋은 공원 앞에 도착했다. 공원 안에는 호텔 정원과 비슷하게 사각형으로 다듬어진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쭉 이어지는 평지 끝 저 멀리 동그란 터 한가운데,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분수가 있었다. 분수는 파란 하늘을 향해 시원한 물을 끊임없이 쏘아대고 있었다. 혜진은 유럽에 와서 분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분수가 내가 사는 도시 아니, 내 집 앞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 근처에 베드로 성당이 있다고 생각해 봐. 그렇게 끝내주게 멋있는데 누가 거기 살면서 가톨릭을 안 믿을 수 있겠어? 너 어느 성당 다니냐고 누가 물으면, 나? 베드로 성당. 그냥, 가까워서 거기 다녀. 이렇게 말하는 거야. 멋지지?’
누군가가 로마에서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자, 분수를 바라보던 혜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분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맑은 물이 높이 솟아올랐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물줄기는 하늘에 닿는 순간 부서져 동그란 구슬로 변한 후, 세 번의 우아한 곡선을 만들며 분수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탱글탱글한 물방울이 대리석에 부딪혀 깨지며 나는 소리가 경쾌했다. 분수 곳곳이 멋진 조각들로 가득했다. 특히, 층마다 가장자리엔 대리석으로 만든 탐스러운 과일과 귀여운 새끼 제비 조각상이 빙 둘리어 있었다. 분수 주변으로 퍼지는 물의 여운을 느끼며, 혜진은 넓고 건조한 이 공원과 이 분수가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디 가지?”
주연의 말에 셋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수를 기준으로 공원 양 끝에는 초록 잔디가 깔린 높은 언덕이 있었다. 오른편 언덕 꼭대기에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두른, 마치 신화에 나오는 듯한 멋진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기에는 참 멋있었지만, 저기에 꼭 가봐야 하는 걸까 고민이 되었다. 올라가는 계단이 백 개는 되어 보였다. 미희가 여행책을 찾아보고 말했다.
“저기가 커피숍이래. 가보자. 가서 차 마시면서 쉬자.”
“어, 그래. 가자.”
말하고 주연이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걸었다. 혜진도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힘든 표정을 지었다. 둘을 보고 미희가 웃었다.
“하하, 아이고 얘들아, 내가 사줄게. 가자. 저기가 오늘 마지막 코스야.”
“아이고, 사주시긴요. 아닙니다.”
“됐어, 사줄게. 너희가 호텔 때문에 고생도 했고. 그래, 우리 투덜이들.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 아까 역에서도 짜증도 안 내고 잘 기다리고 아주 다 컸어. 기특해서 내가 커피 한 잔씩 사줘야겠다.”
“아니야. 우리가 뭔 고생을 했어. 너희 오빠가 고생하셨지.”
“혜진아, 가만있어. 네가 안 먹으면 나도 안 사주잖아.”
주연의 말에 혜진이 씨익 웃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셋은 계단을 올랐다. 하늘은 깨끗한 파란색이었다. 잘 여문 햇볕이 머리 위로 오롯이 쏟아졌다. 신발 아래로 작은 돌들이 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셋은 말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드디어 셋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 작은 표지판이 매달려 있었다.
“영업 끝났네…”
또 그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셋은 말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지평선 위로 노란 노을이 피어나고 있었다. 셋은 저녁 식사를 사가기로 했다. 어디 가서 저녁을 사 먹을지 고민할 정신도, 영어로 말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힘도 없었다. 오늘 외국인과의 대화는 no more, 이제 그만, 방에 가자마자 씻고 아무거나 먹고 자고 싶었다. 셋은 우아한 가로등 옆 작은 편의점에 들어갔다. 달걀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정체 모를 과자, 바나나를 고른 후, 혜진은 마실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의 집 앞 슈퍼에서 파는, 삼각 봉지에 든 커피 우유를 떠올렸다.
‘그게 제일 생각날 줄이야…’
여행이 길어질수록 혜진은 커피믹스가 간절했다. 그걸 마시면 힘이 번쩍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유럽의 박물관, 기차역, 관광지 그 어느 곳에도 커피 자판기는 없었다. 혜진은 낯선 거리를 걷다가도 왠지 자판기가 있을 것 같은 건물 구석을 슬쩍 보곤 했다.
‘내가 진짜 나중에 저 자리에 커피믹스 자판기 갖다 놓는다…’
음식을 고르고 계산을 마친 셋은 편의점을 나왔다. 미희가 물었다.
“계산 잘했을까? 나이가 있으시던데.”
편의점 주인은 윤기 없는 금발 머리를 하나로 묶은 노인이었다. 무테안경을 쓴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지폐를 한 장씩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돈을 계산했다. 혜진이 영수증을 확인했다.
“아…”
“왜?”
“개수가 안 맞아. 3개인데 2개만 찍혔어. 먼저 가. 금방 갈게.”
“같이 가.”
“아니야, 먼저 가. 아까 보니까 좀 걸릴 거 같아. 가서 먼저 씻어.”
“아, 그래.”
친구들을 보내고 혜진은 다시 편의점에 들어갔다. 잠시 후 편의점에서 나온 혜진은 호텔로 향했다. 텅 빈 길 위에 가로등이 켜졌다. 노란 노을은 온데간데없이, 머리 위엔 짙은 색이 가득했다. 붉다 못해 시퍼런 노을이 하늘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피 흘리는 전쟁터 같았다. 태양은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도망쳤다. 시끄러운 하늘 때문에, 혜진은 저기 모인 사람들이 시끄러운 줄 가까이 가서야 알았다. 조용했던 낮과는 달리, 호텔 출입문 바깥에 서른 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까만 덩어리처럼 뭉쳐 웅성대며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자동차의 실루엣이 보였다.
‘우와…’
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그렇게 큰 차를 처음 보았다. 흡사 거인이 타는 차 같았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있던 혜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팔다리가 아팠고 배도 고팠다. 머릿속엔 손에 든 음식 생각이 간절했다. 혜진은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오른쪽 끝 문으로 향했다. 구석에서 천천히 문을 밀어 열자, 낮에 들어왔을 때처럼 직원이 나와 문을 잡아 주었다. 혜진이 직원에게 미소로 답했다. 그때 안쪽 문 너머 로비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키가 크고 날씬한 외국 남성이었다. 베이지색 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은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가 옆을 지날 때 혜진의 고개가 그를 향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우아한 걸음걸이를 따라 구불거리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높은 곳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선글라스 아래로 미소 지은 매력적인 입매가 보였다. 가지런한 치열도 눈에 띄었다. 상쾌한 향수 냄새가 났다. 팔꿈치 아래 정도까지 접은 소매 아래로 단단한 팔이 보였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가 빛났다. 모든 장면이 느린 동작처럼 혜진의 눈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와우!! …!! 미스터!!...”]
[“헤이!”]
그가 바깥문을 열고 나가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자리에 박힌 듯 우두커니 선 혜진의 시선은 계속 그를 향했다. 끊임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비춘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키가 큰 그는 유달리 다리가 길고 곧았다. 여유 있게 인사한 후, 그는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정문 앞에 있던 커다란 승용차의 운전석에 탑승했다. 차가 출발하자 검은 인파가 차를 둘러쌌다. 혜진의 시야에서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 재밌네.’
혜진이 로비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환호를 지르고 환호를 받는 그 사람들 모두, 혜진에겐 낯선 외국인들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 아주 다르지도 않은데. 서로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는 더 잘생기고 더 멋진 사람이 있고 그런 건가…? 음…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그 사람은 다른 외국인들보다 조금 더 키가 컸고, 조금 더 날씬했고, 또 조금 더 어깨가 넓었고, 입매랑 턱선도 예뻤고… 뭐야, 그 새에 나 참 많이도 봤네…’
속으로 웃으며 혜진은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나는 유명한 사람을 본 거야. 누굴까?’
주연과 미희가 로비에 서 있었다. 혜진이 눈짓으로 바깥을 살짝 가리키고는 물었다.
“누구야?”
“앤디 코넬.”
“뭐?”
주연과 미희는 객실로 가는 복도에서 앤디 코넬을 만났다고 했다. 오늘은 영어를 더 이상 못 쓰겠다고 했던 둘은 갑자기 생기가 돌며 그에게 영어로 인사를 했고, 앤디 코넬도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고 했다. 그는 주연과 미희에게 어떻게 이 호텔에 묵게 되었냐고 묻고는 이 호텔 칭찬을 한참 하면서, 지내는 동안 정원과 위층 테라스에도 가보라고 추천도 했다고 했다. 주연이 카메라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이거 내 가보다. 이 한 장을 위해 나는 그 먼 길을 와야만 했던 거야.”
앤디 코넬, 친절한 사람. 사진도 함께 찍어주었다. 무려 각각 한 장씩 독사진을. 혜진은 갑자기 화가 났다.
‘내가 이 음식 때문에 앤디 코넬을 코앞에서 볼 기회를 놓치다니!’
셋은 객실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는 내내 주연과 미희는 앤디 코넬에 대해 쉼 없이 말했다. 혜진은 너무나 부러웠다. 하지만 부러워서 질투나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부러워서 듣기만 해도 좋았다. 앤디 코넬의 위력은 그 정도였다. 나중에 사진을 인화하면 꼭 보여달라고 혜진은 말했다. 어두운 밤이 되었다. 희고 또렷한 달이 밤하늘에 떠올랐다. 나무들 사이 하얀 돌가루 길이 달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그리고 그 위에 기다란 자동차 바퀴 자국이 있었다. 아까 그 하얀 자동차가 호텔을 빠져나가며 만든 자국이었다. 유럽의 어느 어두운 밤, 스물한 살의 김혜진은 성처럼 아름다운 호텔의 한 객실에 놓인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창문 밖 정원 위에 길게 이어진 자동차 바퀴 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앤디 코넬이 다녀간 자리라니… 영광이네…’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 혜진은 혼자 피식 웃었다. 혜진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보았다.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늘 그랬듯 커피는 달콤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유럽 커피는 자신의 입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스트리아의 밤이 깊어져 갔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