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승우가 군대에 간다. 승우가 태어나고 스물여섯 해가 지났는데 군대라는 게 아직도 있다니. 승우를 낳고 너무 예뻐서 나중에 이 아기가 군대를 가면 어쩌나, 거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혜진이 걱정을 할 때면, 남편 종훈은 웃으며 말했었다.
“우리 승우가 다 클 때쯤 엔 군대가 없어졌을 거야.”
그런데 군대는 안 없어졌고 결국 그날은 바로 앞까지 오고야 말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지만, 가는 아이의 마음이 힘들지 않게, 앞에서 펑펑 울어 대지는 말자고 혜진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집에서 혼자 사진을 보고 있으면 울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혜진은 방 한구석에서 몰래 사진을 보며 울었다. 아들의 사진과 남편의 사진을.
결혼하고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종훈이 사진을 많이 가져왔었다. 자신의 아기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의 사진들이었는데, 사진첩에 정리를 다 하고 보니 긴 소설 한 편을 읽은 것 같아 마음이 뭉클했다. 그때 혜진은 승우를 임신 중이었다. 초음파를 보러 갔는데 그 조그만 아기가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태가, 누가 봐도, 십 미터 밖에서 봐도 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네요?”
“… 그렇겠죠?”
남편의 물음에 신중한 의사 선생님은 두루뭉술하게 넘겼지만, 정말 너무나도 아들이어서, 아들이 아니면 그게 대체 뭐냐고 물을 정도여서, 혜진은 임신 내내 남편의 어릴 적 사진들을 보고 또 보았다.
“아, 승우야, 뭐 하니? 우리 아가 놀고 있어요?”
배속에서 승우가 활발히 놀 때면, 혜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부른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면 안에서 올록볼록 움직이는 승우가 느껴졌다. 혜진은 옆에 두었던 남편의 어릴 적 사진첩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우리 승우는 누굴 닮았을까? 이렇게 아빠를 닮았을까?”
혜진의 머릿속에서 사진은 웃음소리와 함께 세월의 향기를 뿜으며 움직이는 그림으로 되살아났다.
‘나도 이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구나. 나도 이렇게 개구쟁이 아들이 귀찮아해도 사진을 억지로라도 같이 찍고, 결국 아이 얼굴 찌푸린 사진만 가득한 이런 사진첩을 만들게 되는구나. 이 꼬맹이가 커서 짧게 머리 깎고 학교 가고, 학원 가고, 대학 가고, 그 옆에서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그리고 나중에 장가갈 때 이렇게 사진 몇 장 추려서 같이 보내겠구나.’
“우리 엄마 이때 젊었네. 엄마가 옷은 항상 잘 입으셨어. 어디서든 제일 멋지게 입고 오셨었거든. 나도 봐. 나 이렇게 어릴 때인데, 멜빵바지에 셔츠까지 맞춰서 입히셨잖아. 나도 진짜 잘 입었었네.”
남편이 이렇게 말할 때면 혜진은 저도 아기 옷이랑 제 옷을 신경 써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다 나중에 증거가 되는 구만……’
남편이 스물한 살 때, 혜진은 그때의 그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군대에 갔다. 사진 속 조금 통통하고 앳된 모습의 그는 매우 굳은 표정으로 군부대 앞에 서 있었고 옆에 시어머님이 계셨다. 남편이 입대하던 날에 찍은 사진이었다. 남편 옆에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시어머님은 참 의연해 보였다. 소중한 큰아들 군대 가는데 어떻게 울지도 않으셨을까?
“왜 안 울었겠어, 보내고 나서 울었지. 며칠 뒤에 입고 들어갔던 종훈이 옷이 담긴 상자가 집에 왔는데, 그게 또 눈물이 너무 나. 처음엔 무서워서 못 열었는데 아빠가 안 열어 보고 뭐 하냐고 해서 열었지. 하하. 그래서 옷도 보고 안에 있던 쪽지도 보고 그랬지.”
그 사진 한 장에 담긴 이야기들을 듣고 또 들으며 혜진은 마음의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왔다. 하지만 그래도 군대가 없어질 거란 승우 아빠의 말을 조금은 믿었었는데, 그 사진은 먼 미래의 예고편이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따라와, 시어머님과 남편 대신 혜진과 승우의 얼굴을 하고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또록
핸드폰 문자 알림이 울렸다. 혜진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 오늘 늦어요. 먼저 주무세요. 걱정 마세요.>
승우였다.
‘둘이 데이트하는구나.’
<알았다.>
혜진은 짧은 답장을 보냈다.
‘둘이 얼마나 데이트하고 싶을까? 얼마나 헤어지기 싫을까? 불쌍하고 예쁜 두 아이.’
일찍 들어오면 더 걱정인 거다. 제일 절절해야 할 시기에. 예쁜 두 나비처럼 팔랑팔랑 같이 날아다니며 데이트 많이 하렴, 혜진은 생각했다.
“나중에 남는 건 추억뿐이야.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 그 시간만이 전부야. 그러니까 좋은 시간 많이 많이 보내.”
오랜만에 쉴 겸, 어린 승우가 좋아하는 물놀이도 많이 할 겸, 세 식구가 근처 호텔에서 하루 자고 오겠다고 시어머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돈 낭비한다고 뭐라 하시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버님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괜히 작은 거짓말하기가 싫어 솔직히 말씀드렸더니,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진 많이 찍어. 늙으면 기억이 자꾸 없어지는데, 사진 찍은 그때는 생생하게 다시 생각나더라. 사진도 많이 찍고 동영상도 많이 찍고. 우리 승우, 물놀이 재밌게 하렴.”
그래서 많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혜진은 이제야 조금씩 다시 본다. 그 시절은 너무 아름다운데 절대로 돌아갈 수 없어서 꺼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분명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그 모든 순간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시뻘건 용암처럼 추억은 모든 것을 다 녹이고 저만치 계속 간다. 떠나지 못하게 막고 싶은데, 너무 뜨겁고 무서워서 막을 수가 없다. 사진 속 종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혜진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꾹 참고 삼키었다.
그는 분명 여기에, 이 세상에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혜진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이 세상을 살았다. 살아있다는 것은 강력한 것이었다.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혜진과 함께 살아있으며 가정이란 작은 세상을 만들고 지켜내었다. 그는 이 가정의 절반이었고, 혜진의 반쪽이었고, 혜진이 믿는 전부였다. 그랬다. 혜진에게 종훈은 세상의 반이 아니라 전부였다. 그가 사라지고 혜진은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실망이나 괴로움이 아닌 단념. 마음 끝이 뚝 잘리며 서서히 부서져 갔다. 끝이 해지고 구겨진 사진 같았다. 혜진이 손에 든 이 낡은 종이 조각이, 그가 그녀와 함께 세상을 살았던 흔적의 전부였다.
‘정말, 다시는 못 만나나요? 다시는 나한테 돌아오지 않나요? 나는… 난 죽고 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지, 그다음 세상은 뭔지, 난 그런 이야기 잘 안 믿는데, 그런데 그런 게 없다고 하면 다시는 못 만나는 거잖아? 그럼 꼭 뭔가가 있어야 하잖아. 그럼, 무언가 있는 거라고 그렇게 믿을 테니까. 그렇게 믿으면, 그러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번개탄 한 장이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나 생각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기에는 승우가 불쌍하고 남편한테 미안하다는 그 두 가지 이유로, 올해만 지내보자 또 올해만 버텨보자 되뇌며, 혜진은 느린 매일을 견뎠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혜진은 그 어떤 표정도 눈물도 없이, 달력 위 변해가는 숫자만 바라보게 되었다.
‘괜찮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곧이야…’
무엇이 ‘곧’인지, 그것이 오면 대체 무엇이 괜찮아진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혜진은 기다렸다. 그때까지.
‘내가 죽어 만나러 가면 남편이 얼마나 화를 낼까? 어떻게 승우만 두고 올 수가 있냐고, 이렇게 오면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할 줄 알았냐고 성을 내겠지.’
그때까지. 남편이 화내지 않고 승우가 몹시 슬프지는 않을 딱 그때까지만 살아보자고, 혜진은 숨을 참듯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어머님도 친정 부모님도 하늘나라로 가신 지 오래인데, 그날은 아직도 먼 것일까? 혜진과 승우만이 남은 평범한 일상은 너무 고되었다. 결국, 혜진은 저승에도 못 가고 이승에도 못 살고, 홀로 중간에 남았다. 기쁨은 외면하고 슬픔은 가득 안은 채로, 승우에게 작은 버팀목이라도 되어주기 위해 한 자리에 우두커니 멈췄다. 이젠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 닳아빠진 조그만 바퀴가 달린, 오래된 영수증과 묵은 빨랫감을 잔뜩 담은 여행 가방처럼. 어느 날 또 용암 같은 추억이 밀려올 때면, 혜진은 모른척하려 고개를 푹 수그렸다. 딱 그때까지만 버티자고, 버텨보자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작게 속삭였다.
‘승우는 겨우 나비일 뿐인데, 이제 봄바람에 날기 시작했는데. 조금 더 여기 서서 바라봐줘야지.’
오래전, 승우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혜진은 겨우 잠든 승우를 침대에 눕히고 거실로 나와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그 왜, ‘지구가 내일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 알지? 나는 이 말이 생의 마지막 날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내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어. 스피노자가 사과를 정말 좋아했나 보다 싶었지. 그런데 요즘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런 뜻이 아니었던 것 같아. 본인이 사과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사과를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 사과나무를 심으려고 했던 것 같아. 옛날에 유럽에서 사과가 아주 중요한 식사 대용이었대. 먹을 게 없던 사람들에겐 나무에 달린 사과를 하나라도 본 날은 아주 운 좋은 날이었던 건가 봐. 구황작물이라고 하는 감자처럼.”
“그래? 사과가?”
“스피노자는 사과나무를 습관처럼 심었을지도 몰라. 적은 돈이라도 생기면 기부하는 사람처럼. 하도 자주 심으니까 어디다 얼마나 심었는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해도, 그래도 계속 심는 거지. 이 열매를 내가 먹을 수 있을지, 열매를 먹고 좋아하는 이를 내가 볼 수 있을지, 열매가 열릴 때까지 내가 살 수나 있을지도 알 수 없어도.”
아기가 잠든 틈에 그림을 그리려고 혜진은 작은 도화지와 색연필을 꺼냈다. 혜진은 원래 간단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기가 생기고는 귀여운 동물이나 과일 같은 것을 그려서 벽에 붙여 두곤 했다. 소리를 작게 줄이고 티브이를 보는 남편 옆에 앉아 혜진은 노란색 색연필로 루돌프 사슴의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심겠다고 하잖아. 나는 그게 포인트인 거 같아. 내일 세상이 멸망해. 나도 죽고 모두 다 죽어. 그걸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어. 그러면 사과나무는 아무 의미 없지. 내일모레에는 사과나무도, 사과도, 사과를 먹을 사람도, 그 누구도 없겠지. 그런데 세상의 마지막 날, 스피노자는 또 삽을 들고, 사과나무를 심으러 나가는 거야. 왜일까?”
“왜?”
“나무를 심는 것이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 된 거 아닐까?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이겠지. 어쩌면 스피노자는 사과나무를 심는 행위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 걸지 몰라. 내일이 되면 나는 이 세상에 없고, 어쩌면 이 세상 전부가 통째로 사라진다고 해도, 그래도 오늘 하루를 내일을 그리며 보내고 싶은 마음. 그것도 모르는 이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혜진이 빨간색 색연필을 들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그런 사람의 세상을. 나는 과연 죽기 전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방 안에서 승우가 잠결에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혜진은 루돌프의 코를 빨갛게 칠했다. 종이 위로 색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혜진의 머릿속은 황량한 벌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늦은 오후, 흙먼지를 뒤집어쓴 스피노자가 삽을 내려놓고 방금 심은 아기 사과나무 옆에 앉아 물을 마시며, 하늘 가득 지구를 향해 쏟아지는 수십 개의 시커멓고 불붙은 거대한 유성 같은 것들을 말없이 올려다보는 상상을 했다. 다가오는 세상의 끝이 눈에 보인다. 그것을 멈출 수도, 스피노자가 도망칠 수도 없다. 그때 스피노자는 어떤 마음일까? 그런 순간이 나에게도 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난 예전엔 단순하게 스피노자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 말도 좋게 해석하면, 죽기 직전에도 착한 일이나 건설적인 일을 하고 죽겠다는 뜻인가 보다 했지. 딱 거기까지가 내 사고 수준이었어. 그런데 그게 지금은 다르게 보여. 훌륭한 사람이었어. 노력과 희생이 아주 자연스러운 본인의 모습이 된 사람.”
혜진이 말을 마치자 조용히 티브이를 보던 종훈이 말했다.
“그게 뭐가 훌륭해? 다들 그렇게 살잖아?”
“누가 그렇게 살아?”
“우리 부모님도, 자기 부모님도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살았잖아.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 거고.”
‘아, 우리가 그렇게 살 거였나?’
혜진은 조금 부담스러워져 피식 웃었다.
“그래? 우리도 그렇게 살 거 같아?”
“그럼. 나는 승우를 위해서 뭐든 다 할 거야.”
“어떻게?”
“내가 만일 곧 죽는다면, 나는 죽는 마지막 날까지 일해서 돈 벌어 모아두고, 우리 승우 커서 보라고 편지 잔뜩 써 놓고, 승우를 위해 최대한 다 만들어 놓고 갈 거야. 그게 부모고, 나도 그런 부모가 될 거야.”
“정말?... 오빠가 내일 죽는다고 해도?”
“그럼. 당연하지. 나 죽는 게 뭐가 중요해.”
“……”
당연하다는 말. 말은 쉽다. 하지만 그것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나 쉽지, 주는 사람으로선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결심인데. 종훈은 그럼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그게 오래된 믿음인 듯, 이미 그런 질문에 답을 준비해 둔 듯, 편안하고 분명하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주겠다고 말하는 사람. 평소 종훈은 혜진에게 너무나 다정하고 그녀를 항상 예뻐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혜진은, ‘나랑 이 사람이랑 수준이 비슷한가 봐, 그래서 우리가 사이가 좋나?’ 속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하 호호 같이 장난치다가도, 남편은 긴 대화의 끝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곧은 대답을 툭 내놓곤 했다. 루돌프의 둥근 코처럼 혜진의 두 볼이 조금 붉어졌다.
이종훈은 강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혜진은 악함은 약함에서 나오고 선함은 강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에, 바르게 인생을 살고 싶다면 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강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마음의 힘이 모자랐던지 그녀는 뾰족하게 강한 사람이 되었고, 종훈은 원래 갖고 있던 그릇이 혜진과는 달랐던지, 넓고 높고 바르게 강한 사람이 되었다. 결혼하고 이런 순간이 몇몇 더 있었는데, 그때마다 혜진은 가장 빛나는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이, 시간이 갈수록 내 생각보다 더 사려 깊고 더 훌륭하고 더 좋은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바로 혜진에겐 선물이었다. 그래서 혜진은 그날의 작지만 따뜻했던 거실과 티브이를 보던 그의 옆모습과 혜진이 그리던 루돌프 그림과 안방에선 아기 승우가 자고 있던 그 순간을 마음에 소중히 담았다.
‘선물,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그랬기 때문에 혜진은 지금 당장 그에게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선물을 결혼 생활 30년 동안 꽤 많이 받은 데다가, 아기 승우는 이제 겨우 나비 승우가 되었고, 아직 이 뭐인가 앞으로 더 한참은 혜진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선 더 이상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진 혜진은 이렇게 삶의 맨 가장자리에 서서 매일 변하는 꽃과 나무와 파란 하늘과 내리는 눈과 쏟아지는 비를 구경꾼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50년 넘게 봐 온 세상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다. 얼마나 넓은 세상인지, 얼마나 아름답고 활기차고 놀라운 세상인지 혜진도 분명히 아는데, 그런데도 이 끝없는 땅 위에 혜진이 사랑하는 그 사람 하나가 없다는 이유로, 이 아름다움은 오래된 흑백 티브이 속 다큐멘터리처럼 변했다.
‘나는 이제 이 흑백 티브이는 그만 봐도 될 것 같아.’
낡은 벽에 홀로 기대어 서서 혜진은 눈앞에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구경한다. 혜진의 머리 위로 그가 심어 두고 간 사과나무의 울창한 그늘이 드리우고 그 꽃향기와 열매가 혜진을 조금 더 살게 한다. 혜진은 흑백 세상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나비의 계절이 끝나면 곧 자신의 등 뒤에 난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서.
띠리링 띠띠 띠리링, 띠리링 띠띠 띠리링
혜진이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운전하던 승우가 물었다.
“엄마, 왜? 누군…”
“여보세요?”
승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진이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약간은 밝은 목소리였다.
<“어디야?”>
“다 왔어. 올림픽대로야.”
<“그래? 빨리 갔다 왔네?”>
“응. 아침 일찍 나왔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듯한 엄마의 통화에 승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데 그래?”
혜진이 스피커폰을 켰다.
<“… 윤아가 같이 가고 싶다고 했는데 오지 말랬다고 서운하다잖아.”>
익숙한 목소리에 승우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승우는 운전에 집중했다. 그런 승우를 슬쩍 보고는 혜진이 말했다.
“스피커폰이야. 차 안이고, 승우가 운전하는 중이고, 지금 다 듣고 있어.”
<“어, 그래? 승우야~ 안녕~ 이모야~”>
“아, 네… 안녕하세요.”
당황한 듯 부끄러운 듯 승우가 답하자 전화기 속 여인의 목소리가 더 밝아졌다.
<“승우야, 우리 윤아가 같이 가서 인사하고 싶다고 했는데, 왜 안 데려가~ 좀 데려가지~.”>
<“엄마, 엄마, 그만해!”>
멀리서 다급한 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우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또 빨개졌다. 그런 아들을 본 혜진이 말없이 피식 웃었다. 혜진이 말했다.
“다음에 같이 가.”
<“그래, 승우야, 다음에 윤아 꼭…”>
<“아후, 엄마 그만해 좀…”>
모녀가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리자, 혜진과 승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를 말리는 소리, 탓하는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몇 번이 지나갔다. 혜진은 스피커를 끄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이제 집에 다 왔어.”
<“점심은, 먹었어?”>
“응.”
<“뭐? 먹었다고? 내가 사주려고 했더니.”>
“거기서 출발할 때 근처에서 사 먹고 출발했어.”
<“그래? 그럼… 이제 뭐 해?”>
“글쎄? 승우는 계획이 있는 것 같고…”
왼쪽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는 승우의 귀가 조금 빨갰다. 혜진이 미소 지었다.
“나는 좀 쉴래.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피곤해.”
<“알았어. 그럼 쉬고 점심은 내일 사 줄게.”>
“내일 안돼. 출근해.”
혜진이 대답하자 승우가 혜진을 슬쩍 보았다.
<“내일 일하는 날 아니잖아?”>
“누가 날짜를 바꿔 달래서 바꿔줬어.”
<“흠…그럼 내일 지나고…”>
“어, 나중에 전화할게. 지금 집에 다 왔어.”
<“어, 얘가 어디 갔지? 언니한테 인사시키려고 했는데 어디 갔는지 안 보이네. 데이트하러 간다고 준비하러 갔나 봐. 참… 하하. 나중에 통화해.”>
“응.”
통화를 마치고 혜진이 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승우가 물었다.
“내일 일하세요?”
“응.”
“거기 직원들이 날짜를 바꿔 달라는 부탁을 자주 해?”
“가끔.”
승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쉽게 바꿔주고 그러지 마.”
“… 왜?”
“엄마를 우습게 보고 그러면…”
혜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휴, 좀 바꿔주면 어때. 나는 한가하고 그 사람들은 젊어서 일하고 돈 벌고 애 키우고 사느라 바쁜데…”
“그래도…”
“이번엔 나도 필요해서 바꾼 거야.”
“왜?”
“너 들어가는 날 쉬려고.”
“…아.”
승우가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자동차가 아파트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자, 주변이 깜깜해졌다. 움직이는 차를 따라 천장의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엄마, 일하는 거 힘들면 바로 그만둬… 알았지?”
“그래.”
“나… 거기 가고 나서도…”
“하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계속 그만두라고 하세요?”
혜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승우가 살짝 웃었다.
“재미로 한 두 달 하시라고 한 건데 벌써 4개월이 지났잖아. 너무 오래 하셨어요.”
“…넉 달이 오래 한 건가?”
혜진이 조수석 창문을 보았다. 유리창에 그녀의 얼굴이 흐리게 비췄다. 주차를 마친 차에서 둘이 내렸다.
“엄마 올라간다. 너는?”
“아……”
승우가 혜진을 따라가지 않고 차 옆에서 머뭇거렸다. 혜진이 미소 지었다.
“올라오지 말고 가. 잘 놀고 와.”
혜진이 승우에게 손을 흔들고는 엘리베이터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승우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올 때 뭐 사 올까?”
“아니.”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세요!”
“그래~”
혜진이 번호를 누르자 유리문이 열렸다. 유리문 안으로 엄마가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승우는 다시 차에 탔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