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런던

헬로, 앤디 1

by SY전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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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조용한 노을이 지는 저녁, 런던 시내에 있는 4층짜리 저택은 어두웠지만 오직 2층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낮게 깔린 작은 침실 한가운데에 놓인 갈색 침대 위에 여행 가방을 펼쳐 두고, 앤디는 드레스룸을 오가며 짐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옷이 구겨지지 않아야 할 텐데.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맡겨야겠군.’]


단순히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면 편안한 옷 몇 벌과 평소 쓰던 세면도구만 챙기면 되었을 테지만, 이번엔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5년 전 딸 내외가 손녀를 데리고 싱가포르로 떠났는데, 앤디는 영화제에 참석한 후 싱가포르로 가서 그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다음엔 호주에 사는 셋째를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영국에 있는 둘째도 올 예정이니 꽤 큰 가족 모임이 될 것이었다.


[“똑똑, 앤디, 저 왔습니다.”]


앤디의 비서 조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조쉬가 갖고 온 서류봉투를 창문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조쉬는 앤디와 함께 일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앤디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그도 벌써 나이가 마흔여섯이었다.


[“약이에요. 여행이 더 길어질 수도 있어서 한 달 치 가져왔는데, 혹시 몰라 싱가포르에서 쓸 수 있게 처방전도 가져왔어요.”]

[“자네의 약은?”]


탁자 옆에 내려놓은 서류 가방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조쉬가 말했다.


[“챙겼어요.”]


올해 예순하나의 앤디는 혈압약을 먹은 지 5년이 되었다. 앤디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약을 챙겨야 했지만, 조쉬는 아니었다. 조쉬는 3년 전 암에 걸렸었다.


[“저야 뭐, 이제 다 나아서 비상약 정도인 거예요.”]


우연히 발견했고 다행히도 초기여서 조쉬는 금방 회복했다. 놀란 앤디가 쉬어야 한다고 말렸지만 조쉬는 다시 일하고 싶다고, 암에 걸린 게 꿈이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지게 평소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며, 그렇게 걱정되면 이번에는 일을 많이 시키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었다.


[“그래, 일하고 싶다면 좋아. 이번엔 내가 자네를 모시고 다니면 되지.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만 다니고 건강한 음식만 먹도록 하세.”]


3년 전 런던 병원 병실에서 암 수술에서 깨어난 조쉬에게 앤디는 그렇게 약속했다. 여행 가방을 닫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앤디는 창문 옆 탁자에 앉아 조쉬가 가져온 처방전과 비행 서류를 보았다. 작은 글씨들이 잘 보이지 않아, 앤디는 탁자 위에 있던 독서 안경을 썼다. 서류에 집중하는 앤디의 옆모습을 보던 조쉬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음… 앤디… 에바가 또 인터뷰를 했어요.”]

[“… 그래?”]

[“뭐, 또 비슷한 이야기예요.”]

[“… 그렇군.”]


에바는 앤디와 2년 정도 만났던 연인이었다. 앤디가 영화를 찍고 전 세계 홍보투어를 돌며 하루에 13개씩 인터뷰를 할 때 만난, 눈에 띄게 재치 있고 밝은 브라질 영화잡지사의 기자였다. 웨이브진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질문하던 에바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긴 하루를 마친 앤디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만날 때에도 눈에 띄게 밝았던 에바는 헤어질 때도 모두의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에바는 앤디와 있었던 사소하고 재밌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자신의 기사에 실으며 인지도를 쌓았다. 원래 기자였으니까, 원래 매력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앤디는 생각했다. 헤어지고 일 년 뒤, 에바는 딸을 출산했다. 그리고 그녀는 묘한 인터뷰를 계속해 나갔다. 그 딸이 앤디의 딸이라는 듯한 내용이었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앤디는 대응하지 않았다. 기사를 계속 흘리면서도 에바는 앤디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왔다.


<[릴리를 한번 보러 와줘요. 앤디를 보고 싶어 해요.]>

<[우리 친구로 지내기로 했잖아요.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예요. 앤디와의 우정을 잃고 싶지 않아요.]>


휴대폰을 볼 때마다 이런 메시지들과 지저분한 기사들이 알람을 울리며 화면을 덮었다. 어느 날부터 두통이 생겼고, 앤디는 더 이상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처방전이든 예약 서류 든, 당분간 중요 문서를 종이로 받아서 확인하는 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안경을 벗은 후 앤디는 조쉬에게 말했다.


[“부산까지 꽤 오래 걸리는군. 내일 공항에서 만나세.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조쉬를 배웅하고 앤디는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방의 창문을 굳게 닫고 커튼도 꼼꼼히 쳤다. 앤디는 침대에 누워 스탠드를 끄고 눈을 감았다. 작은 방 안은 고요했다. 이따금 희미한 자동차 경적이 들렸다.


[“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자꾸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동안 뒤척인 후에야 그는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 출국 수속을 마친 앤디와 조쉬가 비행기 게이트 오픈을 기다리며 공항 라운지에 있을 때였다.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한 조쉬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쉬는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앤디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앤디는 생수 한 병을 손에 들고 커다란 유리창 옆에 서 있었다. 창 아래 그들이 탈 비행기가 내려다보였다. 비행기 옆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앤디에게 당장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열 시간은 족히 비행기를 탈 거고, 그동안에 이 일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모린에겐 따로 연락을 해봐야 할까?’]


고민하던 조쉬의 휴대폰으로 모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조쉬, 저 모린이에요. 저 괜찮아요. 소피 돌보느라 바빠서 그딴 기사 신경 쓸 여력도 없어요. 아빠와 편안히 여행하시고 곧 만나요. ;) 곧!]>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앤디가 조쉬에게 다가와 말했다. 조쉬는 황급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서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전에 사라질 기사야.’]


그렇게 생각하며 조쉬는 앤디를 따라 비행기에 탑승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기내로 들어가 푹신한 좌석에 앉자마자, 조쉬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서류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렸다. 대신 그는 약과 두툼한 안대를 꺼냈다. 가방을 되도록 멀리 치운 후, 그는 수면제 한 알을 먹고 안대를 쓰고 잠에 빠져들었다. 조쉬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통나무처럼 꼼짝하지 않고 잠을 잤다. 중간에 잠깐 일어나 물을 마실 때, 앤디가 그를 살피러 왔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계속 자는 거 같던데,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괜찮아요. 제 약이 좀 졸릴 거라고 했어요.”]


앤디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조쉬는 다시 누워 담요를 턱 끝까지 올리고 안대를 끼고 금방 또 잠에 들었다. 얼마나 더 잤을까? 갑자기 몸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낀 조쉬가 잠에서 깼다.


[“우어어어! 우!”]


터뷸런스로 비행기가 갑자기 큰 하강 곡선을 그리며 내려갔다가 다시 균형을 찾았다. 비행기 안의 승객 모두가 놀랐다. 대한민국 영공에 다다른 비행기를 예상보다 빨리 올라온 태풍이 흔들어 댔다. 몇 번 더 비행기가 휘청거렸다. 드르르륵 거리는 무서운 소음과 함께 기내의 짐칸과 천장이 떨렸다. 승객 한 명이 울음을 터트렸다. 승무원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킬 때 기내 방송이 나왔다.


<[태풍으로 부산공항 운영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부산으로 연결되는 비행 편은 항공사에서 바로…]>


방송을 듣던 조쉬가 승무원에게 물었다.


[“인천에 착륙한다는데, 인천이 부산에서 얼마나 먼가요?”]

[“차로 6시간 정도 걸리고 비행기로는 1시간 정도 걸립니다. 태풍 때문에 연결 비행 편이 바로 운행되기 어렵기 때문에, 내일 오전에 부산으로 가는 비행 편이 마련될 예정입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조쉬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오, 이런….”]

[“왜? 무슨 일이 있나?”]


앤디가 묻자 머뭇거리던 조쉬는 결국 앤디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앤디는 독서 안경을 꺼내 쓰고 폰의 영상을 보았다. 그의 입이 굳게 다물어지고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에바: 앤디는 릴리의 사진을 보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어요. 아시다시피 그는 매우 다정한 사람이잖아요. 릴리도 앤디의 사진을 볼 때면 너무나 좋아한답니다. 둘이 지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뿐이에요.

인터뷰어: 릴리가 앤디를 닮았나요?

에바: 그럼요. 많이 닮았어요.

인터뷰어: 릴리가 앤디의 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에바: 릴리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그를 쏙 빼닮은걸요. 모린보다도 훨씬 앤디를 닮았어요.]>


앤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쉬가 앤디에게 말했다.


[“모린에게서 연락이 왔었어요. 괜찮대요.”]


앤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승무원 한 명이 앤디와 조쉬에게 다가왔다.


[“우선 라운지로 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기자들이 너무 많이 왔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참석하러 한국에 온 전 세계의 기자들이 에바의 자극적인 인터뷰를 보고 앤디가 도착하는 공항에 모여들었다. 영화제 시작 전에 앤디의 기사를 맛보기로 쓰기 위해, 기자들은 신이 나 있었다. 앤디와 조쉬는 기내에 있던 가방만을 챙겨 공항 직원을 따라갔다. 얇은 카펫이 깔린 길고 건조한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소파가 있는 널찍한 라운지였다. 깨끗하다기보단 텅 빈 것에 가까운 거대한 공간에 둘을 남겨두고 직원은 사라졌다. 소파 가운데에 놓인 둥근 테이블 위에는 고급 녹차 음료 두 개가 있었다. 목이 마른 조쉬가 하나를 열어 꿀꺽꿀꺽 마셨다. 그렇게 기다린 지 한 시간쯤 지나 앤디와 조쉬가 지쳐갈 무렵, 공항 직원이 다시 찾아왔다.


[“입국 수속을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하시면 어떨까요?”]

[“어디든 상관없어요. 여기서 나가게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쉬는 서둘러 서류와 짐을 챙겼다. 앤디도 옷걸이에 걸어놓은 코트와 여행 가방을 끌고 직원의 안내를 따라 라운지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이 아무것도 없이 길게 이어지는 조용한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 끝에 있는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기 전, 가벽으로 가려진 곳에서 벽 뒤로 들어가니 비상문이 있었다. 비상문을 열자 아래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여니 공항 건물 밖이었다. 늦은 오후, 하늘은 그 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깔린 공터에는 검은 SUV 차 한 대가 서있었다. 공터 둘레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는데, 철조망의 저 끝 한쪽 귀퉁이가 열려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작은 틈이었다. 앤디와 조쉬는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탔다.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한 조쉬가 말했다.


[“호텔을 부산에 예약해 둬서 지금 서울로 다시 숙소를 알아봐야 해요. 영화제 관계자가 오늘 밤 지낼 호텔을 찾아 주겠다고 했어요. 지금 가는 곳이 서울 중심부라 호텔이 많다는군요. 잘됐죠?”]


조쉬는 오늘 밤 어디에 묵을지, 그리고 내일 부산으로 가는 항공편은 어떻게 될 것인지 누군가와 통화를 한 후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앤디는 달리는 차 창 밖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인천 공항을 출발한 차는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를 소리 없이 달렸다. 창밖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24시간 전에 런던에서 노을을 보며, 앤디는 많은 것들에 안녕을 고하고 싶은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챙겼다. 하지만 그 후 이토록 멀리 날아왔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소문과 기사들과 그 속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끈적거리는 밧줄이 자신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때때로 자잘한 물방울들이 차창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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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로 들어온 차는 금세 서울도심공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곧장 공항 내 사무실로 향했다. 이곳은 매우 한적해서 입국 절차를 금방 마칠 수 있었다. 앤디와 조쉬는 표정에 한층 여유가 생겼다.


[“이제, 호텔과 새 비행편만 정해지면 되겠군요.”]


새 호텔 주소를 아직 받지 못했는데 비행기에 있던 짐은 언제까지 어디로 받아야 할지, 부산으로 가는 비행 편은 어떻게 될 것인지, 조쉬와 앤디 그리고 조쉬의 휴대폰 속 관계자들 간의 복잡한 대화가 이어졌다. 드디어 그들이 사무실을 나가려는 순간, 공항 직원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 정문에도 기자들이 와 있다고 합니다.”]


조쉬가 지친 얼굴로 물었다.


[“기자들이 어떻게 여기를 벌써 올 수 있죠?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빠르죠?”]

[“서울은 크지만, 또 작기도 한 도시입니다. 인천공항이 아니면 이곳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다른 출구가 있으니, 그쪽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숙소는 어디 시죠?”]

[“영화제 직원이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다시 전화를 해볼게요.”]


조쉬가 통화를 시작했다. 그는 스피커폰을 켜두고 통화를 했다. 작은 사무실 안에 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위 사람들은 되도록 조용히 있으려 애썼다. 꽤 긴 통화를 마치고 조쉬가 전화를 끊었다.


[“이곳으로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요. 사람을 보내겠대요. 30분 정도 걸린답니다.”]

[“잘 되었군요. 그럼, 그동안 제가 기다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실 분도 그쪽 출구로 오실 수 있게, 제가 직접 연락을 해도 될까요?”]


그렇게 공항 직원은 영화제 직원과 통화했고 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국말을 하는 그의 대화 내용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앤디와 조쉬는 이 어두운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조쉬가 작은 목소리로 앤디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수면제 없이 잘 잘 거 같아요.”]

[“그래, 고생 많았어.”]


하지만 앤디는 마음이 복잡했다.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작은 사무실 안에서 내내 기다려야만 했던 이 시간은 지겨웠지만, 여기서 나가 보았자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문밖 세상엔 자신과 가족을 곤란하게 하는 기사와 질문이 가득했다. 앤디는 숨이 막혔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와도 내 평화는 금방 망가져 버리지. 다음에 조용히 혼자가 되고 싶으면, 지구를 떠나 달 정도는 가야 되겠어.’]


공항 직원의 안내를 따라 앤디와 조쉬는 자리를 옮겼다. 사무실에서 나와 어둡고 긴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건물 지하였지만 천장이 높아 마치 지상에 닿은 듯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저녁 시간이어서 그런지 주위엔 조명이 모두 꺼져 있었고 복도 끝 대기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 벽 안으로 낮은 탁자와 가구들이 보였다. 처음 보는 인테리어였다. 아마도 바닥에 앉는 공간인 것 같았다.


[‘어쨌든 저 옆에 의자가 있으니, 바닥에 앉지 않아도 되겠군. 다행이야.’]


앤디가 생각하며 대기실 가까이 걸어갔다. 문 앞에 한 직원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공항 직원과 그 대기실 직원은 짧게 인사한 후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기실 직원은 중년의 한국인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앤디가 먼저 인사하자 그 직원은 웃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앤디는 직원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이곳은 묘한 대기실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의 전통 가옥처럼 만든 공간인 것 같았다. 조쉬가 공항 직원과 문밖에서 대화를 나눈 후 안으로 들어와 앤디에게 말했다.


[“건물 밖에서 차를 기다려야겠어요. 준비되면 바로 오겠습니다.”]


공항 직원과 조쉬는 대기실의 불빛에서 멀어지며 지하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앤디는 대기실에 낯선 직원과 둘이 남았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젊었을 적에는 이런 상황이 되면 외로움 혹은 묘한 흥분 같은 감정에 한껏 빠져들기도 했지만, 예순하나엔 그렇지 않았다. 도돌이표를 돌고 돌아 미아가 모이는 방에 다시 쿵 하고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이런 일들은…익숙해지지 않는군.’]


앤디는 무력감을 느꼈다. 처음 와본 나라의 어떤 거대한 건물 지하의 조용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자니, 앤디는 자신이 건물 지하실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 파묻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 있던 의자가 작고 조금 흔들거렸기 때문일까, 앤디는 희한하게도 아주 어릴 적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기억이 났다. 불안감과 불편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붉어지고 더운 기분이 들었다. 혈압 때문일까? 아니면 피로 때문일까? 앤디가 슬쩍 고개를 들어 대기실에 함께 있던 직원을 보았다. 그 직원은 작은 책상에 앉아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앤디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되도록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대기실의 공기 속에서 앤디는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모든 행동과 생각을 천천히 내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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