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얼마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걸까? 눈을 뜨자 앞엔 처음 보는 가구로 가득 찬 낯선 공간이 있었다. 앤디는 그때까지도 한쪽 팔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옆 의자에 올렸다. 탁자 위에 생수 한 병과 오렌지 주스 한 병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앤디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기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앤디는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짙은 나무 바닥 저 안쪽엔 색이 고운 자수가 놓인 사람 키만 한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는 커다란 초록색 매트리스가 있었다. 저곳에 누우면 정말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앤디가 주스를 열어 마셨다. 그때 여직원이 가림막 뒤에서 나왔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앤디가 어색하게 웃었다. 직원도 가볍게 미소를 보였다.
[“긴 하루네요.”]
다가가기만 해도 열리는 자동문처럼 앤디의 입에서 인사말이 툭 튀어나왔다. 직원은 앤디를 흘끗 보고는 또 미소를 지었다.
[‘영어를 못하는가 보군.’]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앤디가 주변과 그 직원을 조심히 살폈다. 대기실 직원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평범한 한국인 여성이었다. 앤디는 다시 한번 천천히 말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영어로 나온 짧은 대답에 앤디의 미소가 조금 더 편안해졌다. 직원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녀가 일하는 것을 보고 앤디는 이제 휴대폰을 보고 있어도 자신이 무례해 보이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좁은 의자에 앉아 있기 힘들었던 그는 폐백실의 나무 마루 위에 걸터앉았다.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마자 알람이 울려 댔다. 손바닥 위로 쏟아지는 메시지와 기사를 보는 앤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제길…”]
저도 모르게 욕을 뱉은 앤디는 깜짝 놀랐다. 그는 곁눈질로 책상에 앉아 있던 직원을 확인했다.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못 들은 것 같았다. 앤디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읽기 시작했다. 유튜브, 블로그, 길고 짧은 가십 기사들까지, 온통 앤디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레베카에 관한 이야기와 그 후로 앤디와 데이트를 했던 여성들의 사진들도 함께 떠들썩한 댓글을 받고 있었다. 결국 모린의 어릴 적 사진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고 앤디는 화가 났다. 그는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싶었다. 한숨만으로는 도저히 머릿속에 쌓이는 화를 해소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속내를 중얼거리며, 그는 읽지 못한 메일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손에 쥔 조그만 기계의 화면을 터치하는 앤디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의 머릿속엔 비행기를 흔들어대던 태풍보다 더 큰 지저분한 가십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귓가에 작은 멜로디가 들렸다. 앤디가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가구 위에 있던 작은 스피커에서 낮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벼운 재즈 음악이었다. 적막했던 공간을 부드러운 리듬이 천천히 채웠다.
[‘음악이 있으니 한결 낫군.’]
삐삐삐삐 삐삐삐삐
대기실의 인터폰이 울리자, 직원이 받았다. 직원은 한국어로 몇 마디 대답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가운데에 높이 올려진 나무 바닥으로 올라간 뒤, 뒷벽 가까이 놓인 가림막 뒤로 들어갔다. 앤디는 그녀가 사라진 가림막을 바라보았다. 가림막엔 전체적으로 하늘과 산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붓으로 그린 듯 가벼운 선으로 이어진 그림이었지만 사실, 그림이 아닌 자수였다. 짙은 회색 실로 새긴 것은 높은 산이었다. 산꼭대기는 하얀색과 노란색, 붉은색 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산 위에서 누군가 불꽃놀이라도 하는 건가, 앤디는 생각했다. 산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옅은 노란색과 흰색 자수를 앤디가 눈으로 더듬어 보는 사이, 직원이 가림막 뒤에서 나왔다. 그녀는 물티슈와 과자를 담은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다.
[‘저 뒤에 무언가 있는가 보군.’]
탁자 위에 간식을 올리며 직원이 말했다.
[“차가 막혀 좀 더 기다리셔야 한다고 하네요. 서울은 차가 많아요. 특히 오늘 같은 금요일 밤은 더 그래요.”]
[“아, 네… 고맙습니다.”]
앤디가 놀란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은 방금 영어로 말했다.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니었군. 혹시, 내가 아까 나쁜 말을 했던가? 아니겠지?’]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는 척하며, 앤디는 조금 전에 자신이 욕을 했는지 아닌지를 떠올려보려 애썼다. 앤디가 직원을 슬쩍 살폈다. 그 직원은 아까처럼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 둔 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모니터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 보였다. 평범한 키에 약간 통통한 이 한국인 여직원은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앤디가 런던에서 급히 무언가 필요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작은 상점에 들어갔을 때 마주쳤던 아시아인 아주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가 있을 것 같은 나이대의 부인. 그런 사람들은 앤디가 매너 있게 행동하면 기뻐하며 함께 예의를 갖춰 응대해 주는, 앤디가 가볍게 대화할 수 있는 안전한 사람들이었다. 앤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문밖으로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화장실 표지가 보입니다.”]
앤디는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건물 안은 사방이 고요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은 고급 호텔처럼 호화로웠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손을 씻고 가볍게 세수도 하자 정신이 맑아졌다. 대기실로 돌아오는 길에 앤디는 유리문 너머로 직원의 모습을 보았다. 다시 보니 그 직원은 컴퓨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작은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간 앤디는 아까 자신이 걸터앉아 있던 나무 마루 위에 도톰한 쿠션이 올려진 것을 알아챘다. 앤디가 물었다.
[“원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시나요?”]
[“아니요. 특별한 경우에 만요.”]
[“그럼, 저 때문이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시겠군요. 가족들이 걱정하겠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탁자에 있던 생수병을 들어 상표를 읽으며 앤디가 말했다.
[“저도 아이들이 어릴 때는 촬영이 늦어지면 곤란했죠. 그땐 휴대폰이 없어서 바로 연락할 수도 없었거든요. 지금은 다른 나라에 있지만, 아무 때나 별일 아닌 일에도 연락을 주고받지요.”]
[“그렇죠.”]
짧은 대답이었지만 편안한 목소리였다. 앤디의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갈증은 물이 아닌 평범한 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앤디는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덧붙였다.
[“저는 내일 부산으로 가야 하는데, 부산을 아시나요?”]
[“네.”]
[“혹시 부산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나 유명한 음식이 있습니까?”]
직원은 조금 생각하다가 작은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해운대라고 유명한 해변이 있는데, 해변 끝에 하얗고 큰 건물이 있어요.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이 시원하고 아름다워요. 건물 일 층에 요트를 타는 선착장이 있고, 그 건물 이 층과 삼 층에서 햄버거를 파는데 이름이 ‘라구나버거’ 에요.”]
[“라구나? 라구나버거?”]
[“네. 부산에 ‘라구나버거’가 유명하니까 한 번 가보세요. 창가에 앉아서 버거와 맥주를 마시면서 파란 바다를 볼 수 있어요.”]
앤디가 다시 물었다.
[“‘라구나’ 라고요?”]
직원은 웃었다.
[“네. 아마 부산시가 캘리포니아와 결연하였나 그럴 거예요. 그래서 거기 뒤쪽에 라구나 스트리트라는 거리도 있어요.”]
[“아! 재밌네요.”]
앤디는 웃었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도 본 적 없던 라구나버거를 대한민국 부산에서 먹을 수 있다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앤디가 물었다.
[“거기에 가보신 적 있나요?”]
[“그럼요. 여러 번 갔었어요.”]
[“가족들과 함께요?”]
[“네. 밤에는 펍처럼 운영하지만, 낮에는 버거와 음료만 팔기 때문에 아이와 가기가 좋아요. 버거를 먹고 요트도 탔어요.”]
[“아이가 있으시군요.”]
[“네, 아들이 하나 있어요.”]
앤디는 모린과 애쉬튼, 브랜든을 차례로 떠올렸다. 직원을 바라보며 앤디가 말했다.
[“아드님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오늘은 그 애도 늦을 거예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청소년이 어디를 갔다는 이야기 인가 궁금해진 앤디가 물었다.
[“실례지만, 아들의 나이가…?]
[“어른이에요.”]
[“아…”]
생각보다 자녀의 나이가 많았다. 그렇다면 이 직원도 그렇겠군 생각하며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군대에 가요.”]
[“오, 군인인가요?”]
[“아니요. 한국 남자들은 2년 정도 군복무를 해요. 다녀오면 다시 자신이 하던 일로 돌아가요.”]
[“한국 남자들이요? 모든 한국 남자가요?”]
[“네. 모든 남자가요.”]
[“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앤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면 자신이 한국에 도착해서 만났던 그 모든 한국 남자가 한때는 다 군인이었단 건가, 그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그럼, 남편이 댁에서 기다리시겠군요.”]
[“… 아니요.”]
대답하고 혜진은 잠시 앤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질문이 낯설었다. 혜진은 결혼하며 일을 그만두었고 오로지 승우만 키웠다. 그렇다고 지루한 삶은 아니었다. 종훈과 20년 넘게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별의별 일들을 겪었다. 그런데도 혜진은 자신이 이렇게 처음 본 사람과 단둘이 앉아 개인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질문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혜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질문. 고민하는 혜진의 시선을 느낀 앤디가 재빨리 덧붙였다.
[“제가 질문이 너무 많았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남편은 5년 전에 암으로 사망했어요. 아들은 군 복무를 준비하는 중이라 바쁘고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늦게까지 일해도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앤디가 거듭 사과했다.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까 물어보실 자격이 있으세요.”]
혜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저는 코넬 씨를 잘 아니까요. 유명한 분이시죠. 당신의 이야기는 모든 곳에 등장하죠.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디에 살고, 언제 어떤 영화를 찍었고, 친구나 가족에 대한 것들까지. 생각해 보니 저는 코넬 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네요.”]
앤디는 씁쓸히 시선을 떨궜다.
[“네. 많은 사람들이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죠.”]
[“그래서 저만 일방적으로 코넬 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에 관해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저에 대해 아시면 덜 불안하실 거예요.”]
[“제가 왜 불안하죠?”]
[“낯선 나라의 조용하고 어두운 건물 지하실에 처음 보는 아시아 여인과 둘이 있으니까요.”]
혜진이 장난스레 심각한 표정을 짓자, 앤디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맞네요. 무섭습니다. 사실 아까 여기 들어올 때부터 무서웠어요.”]
앤디가 생수병을 탁자에 올리며 좀 더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다 영어를 잘하나요? 어떻게 영어를 이렇게 잘하시죠?”]
[“저는 젊었을 때 1년 동안 미국으로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어요.”]
[“미국 어디요?”]
[“뉴욕.”]
[“아하…”]
음악이 흐르는 폐백실 안에서 앤디는 마루에 걸터앉아 직원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엔 딱딱한 나무가 아닌 푹신한 쿠션 위였다. 앤디가 물었다.
[“뉴욕에선 어디에 살았나요?”]
[“처음엔 학교 기숙사에서 살다가 나중에는 근처 스튜디오에서 아는 사람들 넷이 같이 살았어요. 좁은 곳에서 함께 사는 게 불편했지만, 돈도 아끼고 친구가 생겨서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이름도 다 기억이 안 나요. 다들 어떻게 지내나 싶네요. 다시 만난 대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먼 기억을 떠올려 보는 그녀에게 앤디가 불쑥 말했다.
[“사실, 저도 뉴욕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혜진이 웃었다. 앤디도 웃었다.
[“거기서 일도 했었고요. 그곳을 꽤 잘 압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앤디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는 처음 출연했던 영화 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에 영국에서 데뷔한 유명한 아역배우였던 그는 영화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8세가 되기 직전 가을이었다.
[“새로운 곳에 가서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젊었고, 할리우드니까요.”]
[“와…”]
혜진이 그의 말에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편안한 듯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매우 집중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긴 영어 대화였기 때문이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감싼 외국어를 계산하듯 곱씹으며, 혜진은 그의 눈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아름다우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갔더니, 정말 모든 게 대단하더군요. 새롭고, 크고, 멋지고… 하여튼, 하루하루가 놀라웠어요.”]
앤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 미소 끝은 조금 씁쓸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
[“하하하.”]
그가 갑자기 소리 내 웃었다. 혜진도 따라 웃어주었다. 사실, 혜진은 그의 이야기 전부를 이해하고 있진 않았다. 영어가 문제이기도 했지만,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 순간이 신기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저 유명한 스타가 내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고 있다니.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까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니, 지금은 좀 나아졌나 보네.’
[“언젠가 한 번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전망대가 문을 닫는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만 촬영할 수 있어서 밤낮이 바뀐 채 한 달을 살았어요. 드디어 영화 촬영이 끝나고 다음 날 배우들이 거기 모두 모여 기념 촬영을 하기로 했는데, 세상에, 거기 아무도 안 나온 거예요. 다들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한 거죠. 오직 한 명이 나왔는데… 누굴까요?”]
혜진이 머뭇거리다 손을 들어 앤디를 가리켰다.
[“맞아요. 저만 갔어요. 영화사에서 배우들을 위해 작은 기념품을 12개나 준비했는데 아무도 안 와서 그걸 제가 다 가졌어요. 12개 전부를.”]
[“그래서… 나중에 나눠 주었나요?”]
[“아니요.”]
앤디가 단호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너무 오래전이라 이름도 다 기억이 안 나요. 다시 만난 대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의 말에 혜진이 웃었다. 덩달아 앤디도 웃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생각하니 앤디는 헛웃음이 나왔다. 원래 그는 이렇지 않았다. 평소 앤디는 대화할 때 상대방이 흥미 있어할 주제로, 반응이 괜찮을 정도의 길이로만 이야기했고, 될 수 있으면 듣는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이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앤디가 말했다.
[“제가 재미없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지루하게 만든 것 같네요.”]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확인하려는 듯 둥그렇게 뜬 그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혜진이 웃었다.
[“정말이에요.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였어요... 지난 5년간 들은 이야기 중에.”]
그녀의 말에 놀란 앤디의 눈이 더 커졌다. 혜진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하는 것은 혜진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이야기는 뉴욕의 날씨와 기념품과 길거리에서 먹었던 이상한 음식으로 이어졌다.
[“… 남편을 그때 만났어요. 제가 한국에 들어오려고 저 대신 스튜디오에 살 사람을 구할 때 남편이 왔어요. 제가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그냥 돌아갈 수 없었어요. 비행기표 날짜를 미루고 남편과 지냈어요.”]
[“와, 적극적이군요.”]
[“네. 그랬어요. 아주 오래전이에요. 그때는 그 사람에 대한 완전한 확신이 있었어요. 꼭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후에 비자 때문에 제가 먼저 한국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일 년 정도 지나서 남편이 돌아왔고, 우리는 결혼했어요.”]
[“해피 앤딩이군요. 멋진 이야기예요.”]
[“네. 그런데 이건 아무도 몰라요. 저랑 남편만 아는 이야기예요. 비밀이거든요.”]
[“왜요?”]
[“아이가 저희를 따라 할까 봐서요. 결혼 전에 동거는 안 된다고 강하게 가르치고 있거든요.”]
혜진이 말하고 웃자, 앤디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제 아들은 아빠 엄마가 한국에서 만난 줄 알아요. 뉴욕에서 함께 있었던 것은 전혀 몰라요. 뉴욕 사진이 정말 많은데, 아이한테는 결혼하고 함께 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아이는 그냥 그런 가 보다 하는 것 같아요.”]
앤디는 웃었다. 맞다. 부모는 그렇게 말하게 된다. 알고 보면 자신들의 인생은 알아서 재미나게 살았으면서, 그리고 속으로는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재밌게 살기를 바라면서, 말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앤디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오래된 가족의 비밀을 저한테 말해도 되나요?”]
[“괜찮아요.”]
[“왜죠?”]
[“코넬 씨가 비밀을 잘 지킬 거라고 믿거든요.”]
그 말에 앤디는 푸른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꾹 다문 채로 검지와 엄지로 자기 입이 완전히 밀봉되었다는 손짓을 했다. 혜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가 또 언제 코넬 씨를 만나겠어요. 다시 볼 수 없을 테니 상관없어요.”]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