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속았수다
딸: 아빠, 우리 시장 얘기 좀 더해요. 저번에 아빠가 그 억척스러운 한국 엄마들 이야기했잖아요.
아빠: 그렇지. 한국의 어머니들, 그 강인한 생활력. 그게 시장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모습 중 하나야. 그런 엄마들이 시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그런 거 사진으로 많이 담았지. 내 사진의 주제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장 사람들이 사진소재로는 최고라 생각해서 시장 사람들 사진을 참 많이 찍었어.
딸: 맞아! 아빠 사진 보면 그런 게 딱 보여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난 엄마들이 머리에 무거운 바구니이고 가는 사진 보면 목 부러질 것 같아서 막 내 목도 아픈 기분이에요.
아빠: 그게 다 먹고살기 위해서지. 옛날엔 차도 없고 리어카도 제대로 없으니까, 머리에 이고 십리길씩 걸어 다녔어. 인천 송도 앞바다에서 조개 캐서 머리에 이고 오는 장면, 그거 기억나지? 요즘은 경운기라도 타고 오지만, 그땐 걸어야 했으니까. 조개 한 바구니면 몇 킬로그램이야. 그걸 머리에 이고, 가끔은 애까지 업고.
딸: 조개 바구니에 애까지?! 이거 실화예요? 헬스장이 필요 없네요! 그 시절 어머님들, 찐 근력 몬스터였네! 데드리프트+스쿼트+밸런스 트레이닝 풀코스를 출퇴근 루틴으로 소화하셨다구요? 현대인들 PT 끊고 이러는데, 우리 어머니들은 이미 일상 속에서 코어를 불태우고 계셨네. 조개 한 바구니이고 십리길 걸으면 끝!" 이게 K-전통 피트니스지 뭐야! 그때 어머니들 인바디 측정하면 체지방율 0%였을 듯…
아빠: ㅎㅎㅎ 이 녀석 또 까분다. 피트니스 같은 말은 있지도 않았지. 먹고살기도 정신이 없었겠지. 그냥 살아내는 거였으니까. 그냥 먹고살기 위해서 몸이 고단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이야. 시장 바닥에서 앉아 돈 세는 엄마들, 바닷가에서 나물 캐서 파는 아주머니들, 새벽부터 나와서 물건 깔고 호객하는 사람들… 다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았어.
딸: 아빠, 근데 사진 속 엄마들을 잘 보면 표정이 두 가지예요. 한쪽은 진짜 억척스럽고, 한쪽은 그냥 막 웃고 있고. 어떻게 저렇게 고단한데 웃을 수가 있지?
아빠: 그게 고생스러움 속에서도 살아내는 시장의 묘미야.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밝게 살아가려고 했던 거지. 장사하면서 옆집 아줌마랑 농담도 하고, 흥정하면서 "에이, 오늘은 단골이니까 천 원 깎아 줄게!" 이런 거 하면서 살아가는 거야. 진짜 삶의 현장인 거지. 막 애들 들쳐 업고, 애가 울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무대서나 젖도 먹이면서 억척스럽게 장사하고… 가끔 보면 담배 하나 피우면서 짧은 휴식을 가지는 아주머니들도 있어.
딸: 맞아! 아빠 사진 중에 어떤 아줌마는 머리에 나물바구니이고 담배 물고 있었어요. 완전 간지작렬! 넷플릭스에서 최고 화제가 됐던 아이유 나오는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 보면 그런 아줌마들 아주 많이 나오더라고요. 주인공 애순이 엄마도 담배 숨겨놓고… 그때는 담배를 정말 많이 피우던 시절인가 봐요.
아빠: 그렇지, 고단하니깐 담배를 피우면서 힘든 걸 좀 달래지 않았을까? 근데 "폭삭 속았다"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속았다는 건가?
딸: 에헤~ 아빠 그 드라마 안 보셨구나? 엄청 인기 있던 드라마 자나요! 1950년대 제주를 배경으로, 반항적인 문학소녀 애순이랑 무뚝뚝하고 성실한 관식이의 이야기인데. 애순이는 아이유고, 관식이는 박보검이 했어요. 그게 그 시절의 한국 엄마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더라고요. 해녀 이야기가 한가득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해녀를 잠녀라고 하거든요. 원래 제주에서 해녀(潛女, 잠녀)를 부를 때 '잠녀'라고 했데요. 뭔 소린가 해서 찾아봤거든요? '잠'은 '잠수하다'는 뜻이고, '녀'는 여자라는 거. 즉, 물에 잠수해서 해산물을 캐는 여성이라는 의미더라고요. 근데 해녀보다는 어감이 안 좋지요? 약간 깔보는 의미로 잠녀라고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를 보면 잠녀들이 목숨을 걸고 조개며, 고동, 전복을 캐는데, 그렇게 딴 해산물들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것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폭삭 속았수다.’라는 게 속았다는 게 아니고 아주 수고했다는 뜻이에요. 암튼 아주 재밌게 봤어요. 내 인생드라마가 아이유 나오는 ‘나의 아저씨’인데 아이유 나오는 드라마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거든요. 역시 잘 만들었더라고요.
아빠: 그래? 나도 한번 봐야겠네. 아무튼,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녹아 있는 곳이지.
딸: 그럼 아빠가 본 시장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뭐였어요?
아빠: 음… 시장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새벽시장.
딸: 새벽시장?
아빠: 응. 아직 해도 뜨기 전인데, 사람들이 물건을 들고 시장에 몰려와. 그러면 그걸 빨리 팔아야 하니까 가격을 후려쳐서라도 팔고 가려고 해.
딸: 빨리 팔고 집에 가야 하니까? 맞다, 아빠 사진 중에 보면 막 돈 세는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진도 있더라고요.
아빠: 그렇지. 돈을 세고 있다는 건 장사가 잘됐다는 거고, 장사가 잘됐다는 건 오늘 저녁 반찬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뜻이니까. 오래 남아 있으면 손해니까. 그래서 덤으로 막 퍼주기도 하고, 호객 행위도 더 거칠어지지. "이거 안 사면 후회한다!"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냥 시장보다 새벽시장은 더 극적이야. 어둑어둑할 때부터 사람들이 물건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나와. 바닷가 근처 시장이면 물에 젖은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고기 나르고, 농촌 시장이면 봄나물 한 바구니 들고 나와서 "오늘 뜯은 거야~" 하고 팔고 있지.
딸: 크으~ 이거 완전 홈쇼핑이잖아요?! "지금 아니면 후회합니다~! 막차 타세요~!" 외치는 거나, 덤으로 더 얹어주는 거나, 급박한 분위기로 지갑 열게 만드는 거나 똑같네! 근데 홈쇼핑은 AI 음성으로 떠들어도 되는데, 시장은 찐텐션 필수잖아요? "이거 안 사면 평생 후회할 겁니다!" 하는 순간, 옆에서 "맞아, 나 저번에 안 샀다가 후회함!" 이런 바람잡이(?)라도 등장하면 바로 결제각이지. 근데 아빠, 이렇게 보면 새벽시장은 그냥 홈쇼핑보다 더 감성 있는 ‘라이브 커머스’ 아닙니까?!
아빠: 맞아. 그러게. 시장이라는 곳은 참 신기한 데야. 여기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먹을 게 넘쳐나는데도 또 배고픈 사람이 있지.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사진으로 보면 시장은 분주한 풍경 속에서도 표정이 참 많아. 웃는 사람, 짜증난 사람, 애 업고 장사하는 사람, 또 뭐 손님하고 실랑이하는 사람까지. 게다가 시장의 룰이 있지. 오랜 단골들에게 먼저 좋은 물건이 가고, 얼굴 익은 사람들에게만 살짝 덤을 얹어 주는 그런 거. 그게 시장의 매력이야. 단순한 상거래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공간이지.
딸: 와우~ 시장이 단순한 거래소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장이었다니! 단골들이 VIP 대접받고, 얼굴 익으면 자연스럽게 덤도 받는 그런 정(情) 경제가 돌아가는 거잖아요? 요즘 MZ는 앱으로 쿠폰 쌓고 포인트 적립하는데, 시장은 얼굴이 쿠폰이고 인사 한 마디가 포인트 적립 같은데요. 감성 미쳤다... 그러면 아빠, 시장이란 공간은 결국 뭐라고 생각해요? ‘정(情) 기반 거래소’? ‘관계 맛집’?
아빠: 시장? 시장은… 생존의 공간이지.
딸: 오… 철학적인데요?
아빠: 거기선 누가 더 억척스럽고, 누가 더 빠르고, 누가 더 강한지가 드러나. 그리고 동시에, 누가 더 따뜻하고, 누가 더 인간적인지도 보이지. 그러니까 시장은 그냥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거지. 그 속에서 사람들은 웃고, 울고, 싸우고, 또 화해하고. 그래서 시장을 보면 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있어. 시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 같았단다. 지금도 시장은 대형 마트와는 다른 매력이 있잖아. 그냥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채집된 것들. 근데 그런 시장도 점점 사라지고 있긴 하지. 나는 요즘에도 페이스북에 시장 사진들은 열심히 올리고 있단다. 근데 확실히 예전보다는 좀 다르지. 비닐봉지가 많아졌고, 포장된 제품도 많아졌고, 시장은 변했지. 예전에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서로 얼굴 보고 흥정도 하고, 가게 주인하고 친해지기도 했는데, 그 정겨운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
딸: 아쉽네요. 아… 아빠 말 들으니까 괜히 뭉클하네요. 그래서 시장 떡볶이가 더 맛있는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인건가? 그 갬성이 양념처럼 배어 있어서! 그냥 밀떡, 고추장, 설탕 넣고 만든 게 아니라, 세상 사는 이야기 한 스푼, 옆집 아주머니의 인심 반 스푼, 거기에 주인할머니의 손맛까지 풀코스로 추가된 떡볶이니까?? 대형 마트에서 진공포장된 떡볶이를 사면 뭔가 부족한 이유가 딱 그거 같아요. 시장 떡볶이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추억 제조기라서. 그러고 보면, 시장이 사라진다는 건 단순히 물건 파는 공간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 감성마저 없어지는 거라서 더 아쉬운 거 아닐까 싶네요. 참 아빠, 그리고 그거! 전쟁 묘지에서 엄마들이 묘비를 붙잡고 울던 사진 있잖아요. 그거 6.25 때예요? 월남전이에요?
아빠: 그건 월남전이지. 당시 바로 전사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현충원에서 애통해하는 장면이 더 많았어. 6.25는 좀 시간이 지난 때였지. 하지만 월남전은 그 당시엔 아주 큰 상처였어.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조금씩 흐려지긴 하지만, 그 순간의 아픔은 그대로였을 거 아니니. 현충원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들, 그 표정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지. “내 자식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그 앞에서 꺼이꺼이 우는 모습은 바라보기에도 너무 가슴이 아팠지. 그런데 실은, 6.25건 월남전이건, 전쟁으로 누군가를 잃었다는 건 똑같은 거잖아? 시간이 지나면 아픔이 덜해지는 게 아니라, 그저 견디는 방식이 달라질 뿐인 거 같기도 해. 처음에는 막 울다가, 나중에는 그냥 묘비 앞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든지, 말없이 꽃 한 송이 놓고 간다든지… 하지만 그 마음의 무게는 똑같지 않겠니? 그게 전쟁이 남긴 상처지. 누구는 남고, 누구는 가고. 참 가혹한 현실이었어.
딸: 그렇게 보면, 아빠가 찍은 사진 속에 담긴 슬픔은 그냥 "그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는 거 같아요. 전쟁의 시대가 지나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별을 겪고, 그 자리를 찾아가고,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테니까요. 결국 아빠 사진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이 슬픔을 잊지 마라” 같은 거 아닐까요? 그리고 아빠, 그 사진도 있었잖아요! "어디 있어요 엄마, 엄마"라고 다리 밑에 써놓은 거. 그거 볼 때마다 마음이 이상해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처절한 기운이 확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요즘 같으면 SNS에 글을 올렸겠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으니까 벽에 글을 남겼던 거겠죠?
아빠: 아, 한강 다리 밑에서 찍은 사진 말하는 거구나? 뭔가 힘든 사연이 있는 사람이 거기까지 와서 써놓은 거 같아. 요즘은 페이스북이니 블로그니, 어디든 자기감정을 쏟아낼 공간이 있지만, 그때는 그럴 수 없었잖아. 그러니 그 마음을 글로라도 남기고 싶었겠지.
딸: 완전 현실판 익명 커뮤니티네요. "고민 있으면 한강 다리 밑에 써라" 스타일! ㅎㅎ 지금은 온라인에 익명으로 쉽게 마음을 털어놓지만, 그땐 글자 몇 줄 적는 것도 용기였을 것 같아요.
아빠: (웃음) 그렇지. 하지만 그게 참 쓸쓸한 거야. 어쩌면 정처 없이 걷다가, 결국 한강까지 오게 된 게 아닐까 싶어. 지금은 한강이 힐링 스팟이지만, 그때는 진짜 마지막 장소 같은 느낌이었을 거야. 거기까지 가서 마음을 풀어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사람들의 흔적.
딸: 그러니까 아빠 사진 속에는 시장에서의 억척스러운 삶, 전쟁이 남긴 슬픔, 그리고 한강처럼 마음을 풀어놓는 공간까지… 그냥 시대의 풍경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내고,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마음을 남겼는지가 다 담겨 있는 거네요. 사진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감정을 찍어내는 도구라는 게 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아빠: 그래, 사진이라는 게 그렇지. 사진은 그냥 찰칵 찍는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 속의 감정을 담는 거야. 사람들은 잊어버리지만, 사진은 남아. 그리고 나중에 그 사진을 본 누군가는 그때의 감정을 다시 꺼내보게 되지.
딸: (눈 반짝) 오케이, 아빠. 그러면 우리 시장 구경하러 갈래요? 오늘은 제가 큰손 모드 ON 해서 싹 다 사드릴게요! 시장 떡볶이, 꽈배기, 막 튀긴 오징어까지 풀코스로 갑니다!
아빠: (웃음) 그래, 시장 한 바퀴 돌면서 옛날 생각도 하고, 지금의 시장도 한번 보자고. 가면서 예전하고 뭐가 달라졌는지도 한번 같이 봐야겠네.
딸: 좋죠! 아빠 사진 속 시장과 지금 시장, 뭐가 다르고 뭐가 그대로인지 제가 다 체크해 볼게요. 근데 아빠, 그전에 떡볶이부터 사야 해요. 중요한 건 순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