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얼굴, 이경진배우님
아빠: 여기 포니 옆에서 한복 입고 있는 배우가 이경진 배우인데… 우리 딸은 이경진 배우를 아니?
딸: 으응? 누구지? 검색을 해보겠어요! 아! 이분~ 알지~ 알지~ 엄마 역할 많이 하시던 분요?
아빠: 아빠 때는 탤런트 이경진 하면 CF퀸이지 그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트리오랑 어깨 나란히 했던 톱배우야. 근데 현대자동차 모델을 할 때는 아직 신인 배우인 시절이었지. 현대자동차 브뤼셀모터쇼 포니 모델로 이경진 배우가 선정된 거야.
딸 : 근데 아빠, 궁금한 게… 보통 해외 모터쇼 모델들은 화려한 드레스 같은 거 입고 나오지 않아요?
아빠: 그렇지. 다른 부스들은 미니스커트 입은 모델들 이랑 소위 말하면 쭉쭉빵빵한 금발머리 아가씨들이 차 옆에 서 있는 애들도 있었는데, 우리는 좀 달랐어. 우리는 한복!
딸: 엥?? ㅋㅋㅋ 잠깐만요. 모터쇼에서 한복이요? 와… 미쳤다. 진짜 한국 감성 제대로 뿜뿜이네요.
아빠: 응, 제대로 된 전통 한복. 태극 문양 들어간 한복도 있었고, 색동저고리도 있었어. 모터쇼에서 포니를 홍보하는데, 남들처럼 똑같이 하면 안 되잖아. 현대차는 한국에서 만든 차니까, 한국적인 요소를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모터쇼에서 한복 입고 딱 서 있는데, 사람들 반응이 엄청났어. "와!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저 옷은 뭐지?"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포니 부스에 몰려왔어.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효과는 제대로 본 거지. 그땐 부스도 작았으니까, 머리를 써야 했어. 한복 입은 모델이 서 있으니까 사진도 많이 찍히고, 신문에도 나오고, 덕분에 포니도 주목을 받았지.
딸: 그러면 이경진 배우님한테 개런티도 엄청 줬겠네요?
아빠: 아니, 거의 공짜로 갔을 거야. 그래도 현대에서 용돈은 줬어. 전무님이 "그래도 현대자동차 모델인데 용돈은 줘야지!" 하면서 줬지. 얼마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딸: (눈이 휘둥그레짐)?????
아빠: 당시만 해도 해외 출장 가는 게 워낙 귀한 기회였으니까, 돈을 많이 주지 않아도 다들 그냥 갔어. 대신 한복을 두 벌 맞춰줬지. 그 한복이 이리자 한복에서 만든 거였어. 이리자 씨는 한복의 현대화를 이끈 대단한 디자이너야. 당시에도 굉장히 유명했어. 영부인들도 이리자 씨 한복을 입었으니까. 그때 내 월급이 20만원이었거든? 근데 그때 한복 한 벌이 50만 원이었어.
딸: 헐… 진짜 당시 해외 출장 가는 게 엄청난 특권이었나 보네요.
아빠: 그럼. 그때는 일반인이 해외여행 자체를 못 가던 시절이었어.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회였지.
딸: (폭풍 검색) 잠깐만요. 아빠, 여기 이 사진!! 백반기행에 이경진 배우님이 나왔네. 1978년 브뤼셀 모터쇼, 한복 입은 이경진 모델과 포니 전시…
아빠: 그럼! 한복 입고 포니 옆에 서 있는 사진, 그거 아빠가 찍은 거야. 그때는 디지털이 없었으니까 필름 사진으로 남겼는데, 현대차 박물관이나 아카이브 같은 데 가면 그때 내가 찍은 사진들이 많을 거야. 그때 그 사진들이 나중에 전국 자동차 사업소, 홍보용 포스터, 쇼룸까지 도배를 했어.
딸: 와… 이거 완전 현대차 역사 속의 한 장면이잖아요? 아빠, 그러니까 결국 1978년 벨기에 브뤼셀 모터쇼에서 포니 + 한복 모델 + 황태자 방문 = 대박 홍보 이렇게 된 거네요? 그다음은 어디 갔어요?
아빠: 브뤼셀에서 파리로 갔지. 에펠탑, 개선문, 센강,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곳에서 포니 사진을 찍었어.
딸: 그럼 그 유명한 에펠탑 앞에서 찍힌 포니 사진도 아빠가 찍은 거예요?
아빠: 그렇지. 파리에 가면 에펠탑, 개선문, 센강, 루브르 박물관 같은 대표적인 장소에서 찍어야지. 그래야 한국에서도 사진 보고 "아, 이거 파리구나!" 딱 알아보잖아. 근데 그때는 우리가 데려간 모델이 없었거든. 근데 아무래도 포니만 덩그러니 있으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홍보회사에 요청해서 운전기사 겸 모델을 섭외했어.
딸: 운전기사 겸 모델??? ㅋㅋㅋ 아니, 근데 모델이면 모델이고, 운전기사면 운전기사지.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운 거 아닌가요?
아빠: 그때는 가능했지. 우리가 이틀 동안 파리에서 촬영해야 했으니까, 하루는 한 사람, 다음 날은 다른 사람 이렇게 운전기사를 바꿔서 섭외했어. 홍보회사에서 젊고 멋진 여자 운전기사를 구해준 거야. 그리고 차를 몰고 가면서 자연스럽게 사진도 찍고. 그때는 알바 개념이었으니까, 돈을 많이 준 것도 아니었어. 그냥 하루 종일 포니 몰아주고, 가끔 카메라 앞에서 포즈만 잡아주면 되는 거였지. 근데 재밌었던 것은 어디를 가자고 말하면 말이야, 문제가 뭐냐,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개선문에 가자!”하면 그냥 개선문 밑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야. 그러면 사진이 안 되지.
딸: 개선문이 보이는 데를 원하는 거죠?!
아빠: 그렇지, ㅎㅎ 역시 우리 딸내미. 아무튼 내가 불어도 못하는데 어쩌냐? 그래서 내가 그림을 그려줬지. "이게 개선문이면, 거리가 이 정도 있어야 사진을 찍었을 때 이렇게 나오지 않겠냐?" 그렇게 설명하면 금방 또 알아먹더라고. 아니 그 사람이 모델도 아닌데 참 대단하지. 그래도 뭐 한국에 가져가면 그냥 모델인 줄 알지. 워낙 키도 크고, 포즈도 잘 잡아주고 그랬어. 그렇게 그렇게 어찌어찌 찍었단다.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로도 갔어.
딸: 그리스? 아테네에는 왜 갔어요?
아빠: 그리스 아테네에는 포니가 수출이 돼있었어. 포니가 한 250대 정도 수출돼 있었거든. 그런데 ‘포니’라는 이름이 이미 그리스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거기는 ‘HD 1, 2, 3’ 이렇게 들어갔어. 현대(HD)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코드가 붙었지. 거기도 다 연락이 돼 있어서 갔는데, 가니까 또 거기서도 뭐 일이 꼬이더라고. 그래서 결국 현지 수입상의 사장 딸이 운전을 하게 되었지.
딸: 가족 경영이군요.
아빠: 그래 그 딸이 그 회사에서 근무도 하고 있는 것 같았어. 어쨌든 그 사장 따님이 운전해서 아크로폴리스로 갔지. 아크로폴리스는 언덕이 있잖아. 내가 가기 전에 타임스에 나온 도요타 광고를 참고 삼아 찍으려고 준비했거든? 그게 건너편 언덕에서 찍은 사진인데, 막상 가보니까 그런 각도가 안 나오는 거야. "이건 아니다!" 그러는 거지. 그러면 “어디서 찍으면 되냐”라고 물으니까, 그래도 좀 높은 데가 있다고 하더라고.
딸: 그래서 결국 어디로 가셨습니까, 사진작가님?
아빠: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이 좀 보이는 곳으로 가보자고 했지. 돌기둥이 보이는 데로 가야 뭔가 그림이 나오니까. 그렇게 손짓발짓까지 동원해 가면서 아빠가 할 일을 다했지. 그리고, 자! 이제 귀국을 하는데, 여기도 쉽지 않았지! 아테네에서 한국으로 가는데 비행기표가 없어서 참 난리도 아니었지. 아테네에서 한국으로 바로 가는 연결편이 없더라고. 그래서 어떻게든지 경유해서 가야 했어. 루프트한자 항공에서 해결해 준다고 해서 일단 동경으로 갔지. 그런데, 동경에 갔더니 동경-김포 간 노선도 다 찼지 뭐야. 예약도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표가 없는 거야. 그래서 공항에서 우왕좌왕했지.
딸: 어떻게 해… 그럼 공항에서 노숙했어요?
아빠: 그럴 리가 있냐? 공항 직원이 해결해 준다고 했는데… 같이 간 실장이 엄청 항의를 했지. 일단 항공사 카운터 가서 난리를 쳤지. "우리가 아테네에서 여기 가면 해결된다고 했는데, 이게 뭔 상황이냐" 했더니, 직원이 "오늘 표는 없고, 모레 표가 있다" 하더라고. 그래서 항공사에서 호텔을 잡아 줬지. 그런데 처음엔 반반 부담하자고 하더라고. 우리 실장이 가만히 있겠냐? "너희들 잘못했으니까 전액 부담해라" 해서 결국 이틀 동안 공짜 숙박받았어.
딸: 아빠… 이쯤 되면 여행이 아니라 서바이벌 아닌가요? 전쟁 같은 출장이다, 진짜. 그 실장님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우리 아빠는 점잖아서 그 실장님처럼 못 따졌을 것 같아요.
아빠: 하하. 그게 다 일하면서 쌓이는 경험이지. 아무튼 그렇게 뉴재팬 호텔이라는 곳에서 묵었는데, 로비에서 현대 사람들 둘을 만났어. 거기가 현대 직원들이 자주 가는 곳이라더라. 현대 사람들이 다 모이니까 정보도 빠르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일도 풀리고. 결국 이틀 잘 쉬고 한국 들어왔지.
딸: 우와,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다니! 이거 완전 다큐멘터리 만들어야 해요! "포니와 함께한 나의 유럽 대장정"으로!
아빠: ㅎㅎ, 다큐까지야… 예전에는 이런 일이 흔했어. 지금처럼 인터넷 예약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표가 없는 건 기본이고, 가면 없던 일정이 생기고, 있다던 게 없어지고.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거였단다!
그래도 그때는 정말 바쁘고, 재밌게 일했지.
딸: 그러니까, 아빠 젊었을 때는 여행이 아니라 모험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아빠: 그렇지. 그렇게 촬영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 그때 찍은 사진들이 다 현대자동차 포스터, 광고, 브로슈어에 쓰였어. 그나저나… 내가 나올 때 필름 한 커트씩 가져간다고 하고 가져오긴 했는데, 현대 쪽에서도 보관을 잘했을지 모르겠다.
딸: 잘했겠죠. 다 역사적인 자료인데요. 그런 자료들 다 보존해 놓았어야 하는데.
아빠: 그때는 디지털이 아니라서 관리가 힘들었을 거야. 지금 같으면 데이터로 다 남아 있었을 텐데.
딸: 그럼 현대 모터스튜디오 같은 곳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혹시라도 남아 있으면 대박인데! 한번 직접 찾아봐야겠네요. 우리 아빠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찾아서 복원 프로젝트 시작해야겠어요!
아빠: 그래, 한 번 가보자. 좋은 추억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