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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싸를 데려오라! 그는 바로바로 벨기에 황태자

포니의 기똥찬 마케팅!

by Sylvia 실비아

딸: 아빠 소개에 “현대자동차 홍보실(1976~1979년)에서 사진담당으로 일하며, 1978년 1월에는 유럽을 배경으로 포니 자동차 홍보사진을 촬영했다.”라고 나오는데 오늘은 그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아빠: 그래, 내가 1976년 5월에 현대차에 입사했지.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울산공장으로 출장을 가게 됐어. 현대차는 본사가 서울에 있었지만, 자동차는 다 울산공장에서 생산했거든.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울산으로 내려가라”는 지시가 떨어졌어. 그때 포니가 막 나오던 시절이었으니까. 76년 2월인가 3월에 첫 출시가 됐어.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만든 모델이었지. 그러다 보니 마케팅과 홍보가 엄청 중요했어. 차를 예쁘게 찍어서 광고도 하고, 신문에도 실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때는 자동차 촬영할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는 거야. 그때는 마땅한 배경이 없었어. 현대적인 빌딩도 거의 없었고, 촬영할 만한 공간도 부족했지. 자동차를 찍을 때 반사가 심하잖아? 건물들이 조잡하면 그게 전부 차에 비쳐버려. 그래서 사진 찍으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했어. 울산에서는 현대조선소에 가면은 잔디밭이 넓은 영빈관이 있어서 거기서 다 찍고, 서울에서는 여의도 광장에서 찍고 했지. 여의도 광장이 그나마 넓었거든. 그때 여의도는 지금 같은 공원이 아니고, 그냥 드넓은 공터였어. 자동차를 가져다 놓고 하늘을 배경으로 찍으면 반사가 덜 되니까 거기서 촬영을 많이 했지.


딸: 요즘 같으면 그냥 포토샵으로 배경 넣으면 될 텐데…


아빠: 그때는 포토샵이 없었으니까. 다 필름 사진으로 찍고, 필요하면 누끼 작업(배경을 지우는 작업)을 해서 배경을 바꿔야 했어. 그런데 누끼 작업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디지털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거든.


딸: 그럼 해외 출장은 언제부터 가신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아빠가 출장 갔다 오면서 바비인형, 눈 깜빡이는 영국 근위대 인형, 비행기, 자동차 장난감 같은 거를 잔뜩 사다 주셔서, 제 어릴 적 사진 보면 제가 그런 걸 가지고 놀고 있더라고요! 지금 같으면 티니핑 같은 걸 사다준게 아닐까요?

KakaoTalk_20250707_221914353_02.jpg 아빠가 사다 주신 장난감들로 신난 딸 - 사진 박옥수

아빠: 티니핑이 뭐지? ㅎㅎ 1977년 12월 말부터 1978년 1월까지 한 달 동안 유럽 출장을 다녀왔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모터쇼 때문이었지. 그게 내가 처음 외국을 나간 거지. 아빠의 첫 해외 출장이야. 그때는 해외여행 이런 건 꿈도 못 꿀 대단한 일이고 일반인들은 외국에 못 나가고, 회사에서 출장 보내는 게 아니면 갈 수도 없었지.


딸: 헉, 요즘은 저가항공 타고 맘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그럼 유럽까지 어떻게 갔어요? 대한항공 탔어요?


아빠: 그때는 여권도 아무나 못 만들었어. 회사에서 출장 승인을 받아야 했고, 돈도 많이 들었지. 아니, 대한항공이 아니라 동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영국 런던으로 갔어. 아마 브리티시 에어라인이었을 거야. 런던에는 현대자동차 사무소가 있었거든. 현대자동차뿐만 아니라 현대그룹 전체가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어. 지금은 미국이 제일이지만 그때는 모든 금융, 사업은 영국이 중심이었거든. 주재원도 그래. 지금은 가족들을 다 같이 보내주지만, 가족 동반 그런 게 어디 있어? 런던에서 집을 하나 얻어놓고 4명인가 같이 살면서 출퇴근하는 거더라고. 내가 런던에 새벽에 떨어졌지. 주재원들이 마중을 나와서 우리를 일단 사택으로 데려갔어. 아직 호텔 체크인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새벽에 떨어져서 가니까 거기 밥 하는 아주머니가 “선생님들 저거 입맛 없고 깔깔한데 제가 라면 끓여 드릴게요.” 그러면서 라면을 맛있게 끓여 주셔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라면도 없어서 일본 라면으로 속풀이를 했지


딸 : 지금 같으면 해외 슈퍼마켓에 불닭면, 신라면 없는 게 없고, H마트 같은데 가면 회도 팔고 웬만한 한국 마트만큼 좋은데… 그때는 그랬군요!


아빠 : 그랬지. 아침을 그렇게 먹고 사무실로 출근을 했지. 점심도 비빔밥이 도시락으로 배달이 오더라고. 근처 한국식당 하고 계약을 해서 한식을 계속 먹는 것 같았어. 첫날은 그렇게 어영부영 그냥 정신없이 지나갔어. 그런데 저녁이 되니까 가이드가 와서 “구경이나 갑시다” 하더라고. 처음 가는 해외다 보니 뭘 보러 가나 싶었지. 그런데 웬걸, 가보니까 완전 예상 밖의 장소였어. 말하자면 성인 공연장이었어. 거기 관광객들이 엄청 많더라고. 단체 관광객들도 많고, 외국인들도 많고, 분위기가 엄청 북적였지. 그때까지 그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순간 당황했지. 가이드는 “이런 것도 한 번쯤은 경험해 봐야 한다”면서 아주 태연하더라고. 출장 첫날부터 엄청 강렬한 경험을 한 셈이었지 ㅎㅎ.


딸 : 아빠 엄청 충격 먹었겠네요 ㅋㅋ.


아빠 : 그런데 좀 있으니깐 그런 건 그냥 뭐 적응이 되더라고. 성인쇼니깐 홀딱 벗고 쇼도 하고 개그 쇼도 하는데 피곤은 하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 ㅎㅎ 뭔지 모르겠지만 대강 보면서 남들 웃으면 같이 웃는 것이고 그랬지. 그게 아빠의 첫 해외여행인 거야. 그 뒤로는 뭐 해외도 많이 잘 나가고 했지만, 누가 먼저 갔냐로 따지면 아빠가 엄청 빠를 거야. 77년 12월!


딸 : 그래서 런던에서는 뭐 했어요?


아빠 : 아무튼 런던에서 출장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됐어. 당시 런던에는 현대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포니(현대 포니 차량) 두 대가 있었고, 현대조선에서도 업무용으로 한 대를 운용하고 있었지. 이 차들은 단순한 전시용이 아니라, 현지에서 업무 차량으로도 활용되고 있었어. 그때 가이드를 맡았던 직원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가장 신참이었거든. 그래서 우리가 촬영을 위해 이동할 때 그 친구가 직접 포니를 운전해서 안내했어. 원래 일정에 맞춰 런던에서 미리 사진을 찍어두고, 이후 브뤼셀 모터쇼로 이동하기로 했지. 당시 포니가 영국에서 정식으로 판매된 게 아니라서, 영국 도로를 달리는 포니를 촬영하는 게 아주 중요한 미션이었어. 그럼 어디서 찍으면 런던 느낌이 확 살까? 고민이 많았어. 나는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딱 알아볼 수 있는 장소여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촬영 스팟 다섯 군데를 골랐어. 국회의사당, 런던 타워, 윈저성, 버킹엄 궁전, 영국식 벽돌 주택가 같은 곳에서 찍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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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런던 - 사진 박옥수

딸 : 와, 지금도 유명한 곳이네요!


아빠 : 그렇지. 사람들이 봤을 때 “아, 이거 영국이네”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야 홍보 효과가 확실하지. 그래서 버킹엄 궁전도 촬영 장소 중 하나로 골랐어.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는 곳이라 관광객들이 엄청 많거든. 근위병들이 긴 털모자 쓰고, 빨간색 정장 입고 서 있는 곳 있잖아. 그 앞에서 포니를 세워놓고 촬영하고 싶었지. 그런데 문제는… ‘차를 어디다 세울 것이냐’였어. 사람 많고, 경찰도 많고, 교대식 하면 도로도 통제되는데. "야, 그냥 근위병 옆에 차를 갖다 대라" 하고 밀어붙였지.


딸: 헉, 지금 같으면 촬영 허가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공공장소에서 촬영하려면 런던 시청의 공식 승인을 받아야 하며, 블라블라…" 이런 복잡한 절차 있을 것 같은데?


아빠: 그때는 그런 거 없어. 촬영 허가? 그런 거 받을 시간도 없고, 어차피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다’ 이거야. 그래서 그냥 차를 슬쩍 세웠지. 근위병들은 가만히 서서 안 움직이는데, 문제는 관광객들. 아침에 교대식이 끝나면 사람이 우르르 몰려오니까 촬영 자체가 힘들었어. 런던은 도로가 좁고, 차도 많고, 포니를 세우기에는 공간이 부족했거든.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든 타이밍을 맞춰서 포니가 배경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찍었어.


딸: ㅋㅋㅋ 아빠, 완전 게릴라 촬영이었네요?


아빠: 나중에 현대자동차 전시장이나 광고에 쓰였지. 사람들이 “오~ 포니가 유럽에도 다녔구나!” 하고 감탄했지만, 사실은… 실제로 판매된 건 아니었고, 사진만 찍으러 간 거였다는 거지. 약간 컨셉샷이랄까? 사실 그때만 해도 현대차가 해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게 아니라서, 이런 마케팅이 더 중요했어. 사진 한 장이 주는 이미지가 엄청 크거든.


딸: 아빠, 그래서 브뤼셀에서는 뭘 했어요?


아빠: 전시를 했지. 브뤼셀 모터쇼에 현대자동차 포니를 출품한 거야. 그때만 해도 현대차가 해외에서 인지도도 별로 없었고, 부스 위치도 모퉁이에 조그맣게 배정받았었어. 차 두 대 달랑 가져다 놓고 ‘우리가 만든 자동차입니다~’ 하는 정도였지.


딸: 와우... 차 두 대. 왜 이렇게 소박해요?


아빠: 유명한 차도 아니고, 홍보비도 많이 없으니 소박할 수밖에… 다른 회사들은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 롤스로이스 같은 데는 부스 자체가 무슨 호텔 로비처럼 꾸며져 있었고, 직원들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턱시도를 차려입고 손님들한테 직접 문 열어주고 인사하고 그러더라고.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아! 들어가 보니깐 차도 딱 두 대만 전시해 놨는데, 고급스럽게 해 놔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도 감히 못 들어갈 분위기야. 나는 들어가서 다 봤지. 사진도 찍어야 했고, 이런 행사에서 다른 브랜드들이 뭘 하는지도 봐야 하니까. 괜히 눈치 보면 안 돼. 가서 보고 배우고 해야지.


딸: 그래서 포니는 브뤼셀에서 어떻게 홍보했어요?


아빠: 우리는 부스에 차만 가져다 놓은 정도였어. 그래도 홍보회사를 통해서 한 건 했지. 벨기에 황태자를 데려오는 작전!


딸: 황태자요? 아니, 황태자가 차를 사러 온 거예요?


아빠 : 그건 아니고, 황태자가 오면 그게 뉴스거리가 되잖아. 그러면 자연스럽게 포니도 주목을 받을 거고. 그때 홍보 담당 상무가 꽤 머리를 잘 썼어. ‘황태자가 오면 우리 부스도 사람들이 보겠지?’ 하고 생각한 거지.


딸: 그래서 황태자가 진짜 왔어요?


아빠 : 왔지! 황태자가 오니까 사진 기자들도 몰려오고, 우리 부스가 뉴스에 나가게 됐어. 그러니까 일단 첫 단추는 잘 끼운 거지.


딸: 근데 황태자가 와서 뭐 했어요? 차 시승해 봤어요?


아빠: 아니, 와서 보고 가는 거야. 3~4분 만에 일어났을 거야. 황태자는 어찌 보면 행사 다니는 전문가니깐 포즈를 다 잘 취해주지. 그때 중요한 건 사진을 찍는 거였어. 그 짧은 순간을 놓치면 안 되잖아. 황태자랑 같이 찍은 사진이랑 동영상이 필요하니까 내가 실장한테 그랬지. "실장님, 동영상 찍을 때 흔들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가만히 누르고만 계세요." 괜히 카메라 휙휙 돌리면 나중에 영상 보면서 멀미 난다고. 실장은 가만히 동영상을 찍고, 나는 사진을 찍었어. 그 짧은 순간을 놓치면 기회는 없는 거야. 황태자가 다녀간 이후에 엄청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관심이 확 올라갔지. 브뤼셀 모터쇼를 통해 현대차가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까.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유럽을 돌면서 포니를 촬영하는 일정이 시작됐어.


딸: 와, 그게 지금 보면 엄청난 마케팅 전략이었네요. 황태자까지 부르고, 유럽 돌면서 촬영하고… 그때부터 글로벌 브랜드로 가는 길을 열었던 거네요.


아빠: 그렇지. 그때부터 현대차가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까 포니는 그냥 차가 아니라, 한국 자동차 산업의 첫 해외 진출의 역사적인 차였던 거지.


딸: 캬~ 아빠가 그런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니! 인정합니다. 아빠, 진짜 대단한 일 했네요.


19790106-000029-브뤼셀모터쇼 이경진 벨기에황태자.JPG 1979년 브뤼셀모터쇼 - 이경진배우와 벨기에 황태자 - 사진 박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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