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Fisk는_
여행을 떠나면 여정 중에는 분명 대기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적지 않다. 공항 대기 후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는 물론 열차, 버스 같은 각종 육상 교통수단과 관람 등 갖가지 프로그램 이용을 위한 티켓 구입과 대기 시간까지, 어찌 보면 여행은 잠깐의 기쁨과 그 사이 짧거나 긴 기다림의 믹스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기다림의 시간이 흥분에 차 지루함을 잊을 수도 있을 뿐. 얼마 전 다녀온 여행에서는 마슈르카라는 현지 버스가 단연 최고의 기다림이었다. 비대면 시스템과 예약, 예상, 예정이 몸에 밴 K인이라 그런지 이용자 전원이 모여야 출발하는 냉방 없는 현지버스가 지루하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자칫 여행에 불쾌감을 증폭시킬 일련의 시간들을 적절히 해소해 준 것이 넷플릭스 오스트레일리아 시리즈 피스크였다.(아직도 피스크로 읽어야 할지 휘스크로 읽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더러운 융단형 카시트의 찐득함과 피스크의 무표정함이 겹쳐, 복합 심상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아직 내 한 부분이 흑해 연안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있는 기분이다.
개인마다 OTT취향이 다르겠지만 내 경우 인간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여성 주인공(이것 역시 지극히 자의적인 기준이다)이 등장하면 곧바로 빠져드는 편인데 최근 그렇게 정주행한 시리즈들이 ‘푀르니’, ‘리앤은 오늘도’, 그리고 ‘피스크’다. 다른 두 시리즈와 같이 피스크도 피스크가 주인공인데 시즌 2를 절반 이상 즐감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개를 키우며 소박한 삶을 꾸려가는 중년의 돌싱으로, 직업은 유언처리 전문 변호사다. 역시나 개인적 감상의 중점적 포인트는 중년 여성 피스크가 가진 삶에 대한 태도, 구체적으로는 쿨함과 유머가 섞인 진실함이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사실 아직도 미디어가 중년 여성에게 기대하는 캐릭터는 인간적 온기나 푸근함을 지닌, 활기찬 인물인 것 같다.(특히 인간과 동물, 공동체에 따뜻함을 가진(!)) 정반대 성향의 한 사람으로서 상당한 저항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다행이도 피스크는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쪽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나름의 독특한 매력이 몽글몽글 솟아나는데 신기하게도 여행 중 드문드문 기다리는 시간에 그런 것들이 정리가 되고 있었다. 참말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여행하고 있는 대륙과는 정반대 지역의 한 여성 캐릭터의 매력이 덜덜거리는 버스 창문 너머로 드문드문 정리되고 나열된다는 것이.
우선 피스크에게는 특유의 심플함이 있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예민할수록 대접받는다는 초민감 시대를 살아가며 심플함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매력이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큼직한 연황색 배기 스타일 슈트차림으로 출근한다. 오로지 옷을 고르기 귀찮고 편하다는 이유뿐이며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다. 캐릭터의 반영이라 할 스타일부터 솔직하고 스트레이트한 피스크 그대로다.
두 번째는 역시 쿨함. 이전 혼인관계에서 배우자의 외도로 돌싱이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인간관계 모두에 조금도 맺힌 데 없이 매우 쿨하다. 엄마의 사후 성소수자의 길을 선언하신 아빠와도 제법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주 배경이 되는 유언 전문 법률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굴곡으로 법률사무소의 늦깎이 신규사원이 된 입장에서 주변 동료나 의뢰인과의 관계가 편치 않을 법도 하지만 누구에게도 직접 맞서 대립하지 않는다. 관계를 맺고 라포를 형성하는 것에도 불필요한 고민 없이 본연의 성향을 고수하며 쿨하게 다가가고 피드백 또한 쿨하게 받아들인다. 사무실의 권력자이자 또 다른 중년 여성 로츠의 횡포도 갑질로 받아들이기보다 특유의 천연덕스러움으로 눙친다. 앞에서는 수긍, 뒤에서는 실속을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시리즈를 관통하는 드라마의 이유이자 모든 것, 피스크의 매력이 그 언저리에서 발생한다. 이를테면 커피캡슐과 간식, 화장실 열쇠까지 본인의 서랍에 두고 관리하는 로츠에게도 피스크는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방 창문을 넘어 로츠방의 창문으로 들어가 커피캡슐과 크래커를 잔뜩 훔쳐내, 다른 직원과 나누며 기쁨을 만끽한다.
한편 그런 그녀의 내면에도 진지함과 진실함은 별개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유언, 유고 전문 법률 상담가란 극도의 슬픔에 찬 의뢰인에게 가장 비인간적인 것들을 이야기해야 하는 불편한 직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당한 금액의 상속액수를 이성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수수료와 같은 자신의 이익도 챙겨야 하고, 의뢰인을 슬픔의 감정에서 건져 누군가의 사후에도 이어질 생의 모진 날들을 대비 시켜야 하는 일이다. 각자의 고유한 슬픔에 빠져 허덕이는 의뢰인들을 피스크는 나름대로 진지하고 진실하게 대하고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 그리고 본질로 돌아가도록 이끈다. 엄마의 죽음으로 유언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의뢰인에게 자신이 발견한 가성비갑 편의점 라떼를 건네며 편의점 한 구석에 박스를 뒤집어 앉힌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엄마의 죽음을 키워드로 의뢰인과 접점을 찾아간다. 아빠의 화장 후 유골 가루를 1g도 빼앗길 수 없다는 의뢰인을 위해 내연녀에게는 다른 가루를 나눠주고 엄마가 남긴 100가지 양배추 레서피 노트를 찾아 헤매는 의뢰인을 위해서는 거대한 쓰레기더미 속으로 몸을 던진다. 순간순간 진지함이 깃든 피스크의 행동들은 단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뜻하다. 물론 코믹한 장면은 더 코믹하다.
여행도 휴가도 끝났으니 하염없던 대기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루할 틈이라고는 거의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이제 언제 다시 피스크를 완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장 파일이 남아 있는 한 당분간은 피스크를 떠올릴 것이고 조그만 휴대폰과 창밖을 번갈아 봤던 날들도 얼마간은 더 떠올릴 것 같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