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속에서 배운 언어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들

by 문 달


가격표는 숫자를 적지만, 값은 표정에서 시작된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건 눈짓과 손짓, 그리고 속도였다. 시장은 그 질서를 알려주었다.




호이안 — 빛의 시장, 부드러운 합의


강가에 등이 켜지면 흥정도 한결 유연해졌지만, 숫자는 쉽게 깎이지 않았다. 노란 전구 아래, 소원등 불빛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마다 촛농 냄새가 은근히 번졌다. 지글지글 반쎄오가 익는 소리, 얼음 깨는 소리, 계산기 ‘탁탁’이 한 장면에 겹쳤다.


“안매워요? (không cay, 콩 까이)?” 나는 혀끝으로 조심스레 물었고, 상인은 소스병을 반쯤 기울인 채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덜 맵게, 알겠다는 뜻. 숫자는 손가락으로, 마음은 눈으로 움직였다.
소원등을 고르다 말고 작은 배 요금도 흥정했다. 두 손가락을 붙여 “조금”을 말하면, 뱃사공은 미소로 값을 살짝 낮췄다. 가끔은 내가 몇 발짝 물러설 때, 뒤에서 “오케이”가 따라왔다. 돈이 오갈 때 손등이 살짝 닿는 그 순간, 흥정은 끝나고 합의만 남았다. 이 시장의 언어는 크지 않았다. 빛과 미소, 그리고 고개 끄덕임이면 충분했다.



나트랑 — 담시장, 낮의 정확한 손길


해가 머리 위로 오르면 담시장(Chợ Đầm) 통로마다 매달린 선풍기들이 더운 공기를 잘게 잘랐다. 기둥에 고정된 팬이 왔다 갔다 고개를 흔들고, 바닥엔 녹은 얼음물이 가늘게 흘렀다. 상인들은 고무 밀대로 물을 밀어 한쪽으로 모으고, 통로를 비웠다.


한낮의 물건들은 분명했다. 건어물 꾸러미, 말린 새우와 오징어, 견과, 커피, 국수 뭉치,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바구니. 가격표가 붙은 건 쉽게 깎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만 깍아줄수 있나요? (bớt chút được không?,벗 쭛 드억 콩)”을 소곤거렸고, 그는 어깨를 아주 조금만 움직였다. 스프링저울이 숨을 멈추듯 고정되자, 그는 손가락 두 개로 숫자를 보여줬다. 한 번에 안 되면 묶음으로, 같은 가게에서 커피와 견과를 함께 집자 숫자가 조금 내려앉았다.


봉지들이 바스락거리며 어깨 높이에서 오르내리고, 통로 끝 선풍기 바람이 흘린 땀을 빠르게 말렸다. 장바구니가 묵직해질수록 걸음은 가벼워졌다. 정오의 짧은 그림자 속에서, 이 시장을 움직이는 건 숫자가 아니라 손의 박자라는 걸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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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켓 — 올드타운 ‘선데이 마켓’, 소리로 말하는 거리


일요일 오후, 탈랑 로드는 차가 멈추고 사람의 속도로 바뀐다. 시노-포르투갈 양식의 처마 아래 전구 줄이 켜지고, 핫팬에서 오징어가 튀며 코코넛 팬케이크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다. 종이컵 속 라임 조각이 불빛을 받아 유리처럼 반짝인다.


여기서는 음식이 대체로 표시가(정찰)에 가깝고, 소품·액세서리는 같이 사면 조금 깎이는 편이었다. 주문의 핵심은 말투와 속도였다. 손바닥을 아래로 펴며 “조금만(นิดหน่อย,닛 너이)” 하고 천천히 말하면, 상인은 숟가락을 반쯤 멈춰 한 번만 얹었다. 값은 그대로여도 양과 간은 조용히 조절됐다. 기념품 앞에서는 “조금 깎아줄 수 있나요?(ลดหน่อยได้ไหม,롯 너이 다이 마이)” 하고 묶음 가격을 제안하자 고개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지불 방식은 현금이 기본, 몇몇 부스는 QR. 화면에 초록 체크가 뜨며 ‘삐빅’, 줄은 다시 앞으로 흘렀다. 줄의 질서는 간단했다. 내 차례가 오면 눈을 맞추고, 고맙다는 미소 한 번. 이 시장에서 배운 단어는 뜻보다 톤에 가까웠다. 숫자는 크게 움직이지 않았고, 합의는 천천히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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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복 길리 — 야시장, 연기와 합의의 밤


해가 지면 길리 트라왕안 항구 옆 pasar malam(빠사르 말람)에 전구가 켜졌다. 그릴에서 오르는 연기와 kecap manis(케찹 마니스)의 달큰한 향이 바람을 타고 퍼지고, 라임을 짜는 손끝에서 반짝이는 물방울이 튀었다. 길게 붙인 공동 테이블에 플라스틱 접시가 연달아 내려앉고, 얼음 통에서 병음료가 덜컥 소리를 냈다. 휴대용 스피커의 음악, 자전거 바퀴가 모래를 긁는 소리,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 웃음소리까지, 밤은 소리로 먼저 차올랐다.


여기서도 대체로 정찰제라 숫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선택의 폭이 넓었다. 꼬치 몇 개와 생선 한 토막, 반찬을 얹은 nasi campur(나시 짬뿌르, 여러 반찬을 한 접시에 올린 인도네시아식 혼합 덮밥)를 쟁반에 올려 건네면, 가게 쪽에서 양을 맞춘다. 안 맵게라고 하면 매운 양념을 빼거나 순하게 조절해 주었다. 양이 많다 싶으면 조금만. 손바닥을 낮추면 그만큼 덜어냈다. 값을 깎기보다는 반올림 가격을 제안하거나, 같은 자리에서 몇 가지를 묶어 주문하는 쪽이 통했다.


숯불 위에서 sate(사떼)가 번들거리는 사이, 합의는 느리지만 또렷하게 닫혔다. 값은 단단했지만, 소스의 농도와 양, 라임 한 조각의 유무는 부드럽게 조정됐다. 집게가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 멀찍이서 고양이가 그릇을 스치는 소리.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알게 되었다. 이곳의 흥정은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담느냐와 어떻게 말하느냐, 그리고 속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은 자주 늦었고, 몸짓은 늘 먼저 도착했다.

숫자는 쉽지 않았지만, 손의 박자와 눈의 톤이 길을 냈다.

빛과 바람과 소리와 연기를 지나며 나는 배웠다. 시장은 값을 흥정하는 곳이 아니라 여백을 주고받는 장소라는 것을.

다음 도시에서도 나는 먼저 손으로 인사하고, 고개로 합의할 것이다. 그 짧은 합의가 남기는 온기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현지어 팁


베트남어(호이안·나트랑)
không cay (콩 까이): 안 매워요?
bớt chút được không? (벗 쭛 드억 콩?): 조금만 깎아줄 수 있나요?
một chút (못 쭛): 조금만 / ít (잇): 적게


태국어(푸켓)
ไม่เผ็ด (마이 펫): 안 맵게
นิดหน่อย(닛 너이): 조금만
ลดหน่อยได้ไหม (롯 너이 다이 마이): 조금 깎아줄 수 있나요?

인도네시아어(롬복·길리)
tidak pedas (띠닥 쁘다스): 안 매운
sedikit (스디깃): 조금
boleh kurang? (볼레 꾸랑?): 깎아줄 수 있나요?
terima kasih (뜨리마 까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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