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깊은 대화가 몰고 온 몰입의 힘
몇 년 전, 퇴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때 많은 애정과 정성을 쏟았던 회사였지만, 마음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이유 없이 의사결정을 미루고, 정치적 힘겨루기에만 몰두하는 임원들, 최선을 다해 일을 대충하려는 팀장까지. 반 년 넘게 이런 광경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있자니, '이 회사에는 배우며 성장해야 것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의 의미마저 발바닥 밑으로 짓밟히는 듯 했습니다. 이 회사에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죠.
그러던 중, 타 업종의 대기업에서 포지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홧김에 시작한 채용 절차는 정신 차리고 보니 처우 협상까지 끝나 있었고, 사이닝 보너스까지 약속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회사에 마지막으로 방문해 계약서만 쓰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왠지 여전히 무겁고 혼란스러웠습니다.
퇴사를 앞둔 마지막 순간, 가까운 동료들에게 솔직한 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평소에는 쿨한 척, 흔들리지 않는 척했지만, 그날만큼은 미련과 아쉬움, 혼란이 뒤섞인 복잡하고 솔직한 감정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잡을 수 있는 명분이 하나도 없어서 너무 슬픈데, 그래도 한번만 더 참고 같이 열심히 해보면 어때?”
“지금까지 여기서 쌓아온 게 너무 아까운데,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사이닝 보너스는 못 챙겨주지만, 지금 이렇게 사인이라도 해주면 남아줄래? (웃음)”
어떤 이는 진지하게, 어떤 이는 자신만의 위트로. 단 몇 마디였지만 마음 속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평소 믿고 따르던 선배는 제가 소식을 전한 다음 날 갑자기 연차를 쓰고 회사에 나오지 못했는데, 훗날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제 소식이 충격적이어서 몸까지 탈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 마음을 생각하면,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내가 뭐라고...참' 문득 이들과 함께 진심을 다해 이 회사에서 일했던 지난 소중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퇴사 문고리를 잡아 비틀고 나서야, 제가 동료들에게 얼마나 큰 지지와 인정을 받아왔는지 알게 되었죠.
결국, 저는 퇴사를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사소한 관계,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대화에도 움직인다는 사실을요. 퇴사라는 큰 결심 마저도 바꿀 만큼 말이죠.
요즘 MZ세대가 회사에 남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라고 합니다. 돈, 관계, 성취. 세 가지 모두에 빨간불이 켜지면 떠나지만, 하나라도 초록불이면 머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저에게는 바로 ‘관계’가 그 역할을 한 셈입니다. 동료들의 진심이 제 마음을 다시 흔들었고, 차갑게 식었던 회사에 대한 애정의 불씨를 다시 켰습니다.
“언제든 대화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바꿀 수 있고, 특히 양질의 대화는 한 번만 하더라도 효과가 있다.” — 제프리 홀(캔사즈대 교수)
동료들과의 짧지만 진심 어린 대화가 제 퇴사를 막았듯, 조직 차원에서도 의도적으로 이런 ‘대화의 경험’을 제공한다면 어떨까? 이 경험을 토대로, 구성원들의 ‘긍정심리자본(Positive Psychological Capital)’을 키울 수 있는 장치들을 고민했습니다. 희망, 낙관, 회복탄력성, 자기효능감. 이 네 가지는 단순히 개인의 성격 차원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충분히 촉진될 수 있는 심리 자원입니다. 사소하지만 진심 어린 대화는 구성원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낙관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다시 버틸 힘을 주고, 자신감을 회복시킵니다.
그렇게 저는 약 20개 팀을 대상으로 ‘리커넥트(Reconnect)’ 조직개발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단순히 대화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긍정심리자본을 키울 수 있는 대화와 경험 구조를 세밀하게 고민해서 설계했습니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공감하는 질문, 앞으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발언, 그리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작은 유머도 담아냈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단 몇 차례의 짧은 ‘리커넥트’만으로도 팀원들의 몰입이 개선되고, 협업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몰입도 진단 결과, '우호적 동료관계' 동인은 11.0%p, 비금전 보상 영역인 '인정과 칭찬' 지표는 +13.4%p 상승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뼛속까지 TJ형 조직개발자입니다. 손에 잡히지 않고 계량화 되기 어려운 정서보다는 제도와 시스템을 더 중시하고, 일회성 이벤트보다는 장기적인 변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조직개발의 본질이라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제 퇴사 에피소드와 리커넥트 워크숍 경험은 저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연결, 그 경험 자체가 조직개발의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즉, 제도와 시스템만으로 조직을 바라보던 시각을 조금 내려놓고,조직 안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출 때 오히려 더 강력한 몰입의 실마리가 생길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조직을 움직이는 힘은 때로 아주 사소한 대화와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이제는 경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