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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뷔페 Part5

삶을 다운로드하는 시대

by sarihana

제5부: 삐걱대는 멜로디

제13장: 칩의 무게


제이슨의 공허한 눈빛이, 그의 마지막 질문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네가 사는 삶이 진짜라는 증거는 뭐냐?' 나는 병원을 나온 뒤 며칠 동안 유령처럼 도시를 헤맸다. 거울을 볼 때마다 제이슨의 얼굴이, 수많은 페르소나가 뒤섞인 내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는 이 길의 끝에 제이슨과 같은 완전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칩에 의존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모든 것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결심은 섰지만, 실행은 쉽지 않았다. '인생 뷔페'에서 로그아웃하는 것은 가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통스러웠다. 뉴럴링크 고객센터에 칩 제거를 요청하자, 상담원은 내 결정이 '일시적인 신경망 불안정'이라며 새로운 '정서 안정'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라고 권유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수술을 고집했다. 수많은 면책 서류에 서명하고, '자발적 다운그레이드'에 따른 모든 부작용을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겨우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완벽한 상품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차가운 수술실 침대에 다시 누웠을 때, 나는 처음 칩을 이식하던 날의 섣부른 희망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마취가 시작되고, 머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뇌와 연결된 수만 개의 나노 전극이 분리되는 물리적 고통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 몸의 일부가 강제로 뜯겨 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다운로드했던 기억들이 파편화되어 스쳐 지나갔다. 외과의사의 손놀림, 변호사의 언변, 비행사의 시야가 뒤섞여 비명을 지르다 마침내 소멸했다. 내 뇌에 새겨졌던 화려한 거짓들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공백만이 남았다.


제거가 완료되자 세상이 한순간 빛을 잃은 듯 어둑해졌다. 소리는 멀리서 울리듯 먹먹했으며, 모든 색깔은 바래 보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끝없는 정보의 흐름과 시스템의 안내 음성이 사라지자, 견딜 수 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텅 빈 껍데기 같았다. 변호사의 날카로운 언변도, 의사의 섬세한 손기술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침대 옆 테이블의 물컵을 잡으려 했지만, 손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미세하게 떨렸다. 칩이 보조하던 완벽한 운동신경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서툰 존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며칠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과거의 불안과 절망이 몇 배는 더 강력한 괴물이 되어 나를 덮쳤다. 완벽함을 맛본 뒤에 마주한 나의 불완전함은 더욱더 초라하고 끔찍했다.


하지만 그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어둠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소리를 들었다. 두근, 두근. 불규칙하고, 때로는 불안하게 빨라지기도 하는 나의 심장 박동이었다. 그것은 프로그램이 시뮬레이션한 감정이 아니었다. 다운로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뛰고 있는, 나의 생명 그 자체였다. 나는 떨리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완벽하지 않았고,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칩이 부여한 희열이나 기쁨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나의 진짜 감정이 아주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칩이 지워버렸던 '나'라는 존재가, 이 미약한 심장 소리를 신호탄 삼아 비로소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텅 빈 껍데기가 아니라, 온기가 남아 있는 불완전한 나 자신이었다.





제14장: 나의 첫 음


칩 제거 수술 후 며칠이 지났다. 세상은 여전히 희미했고, 나는 무기력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칩이 걸러주던 세상의 모든 소음과 정보가 무자비하게 뇌로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의 자동차 소리, 윗집의 물소리, 냉장고의 모터 소리까지 모든 것이 날카롭게 신경을 긁었다. 완벽하게 해내던 모든 일들이 이제는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아니 그보다 못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방 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낡은 기타 케이스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대학 시절,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연습했지만 결국 F코드를 넘지 못하고 포기했던 나의 첫 번째 꿈, 첫 번째 실패의 증거였다. 칩 이식 후, 기타는 그저 쓸모없는 고물, 나의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흉물에 불과했다.


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케이스를 열었다. 익숙한 나무 냄새와 함께,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좋아하던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어 서툰 솜씨로 코드를 연습하던 밤들. 손가락 끝이 아파 끙끙 앓으면서도, 단 하나의 멜로디를 완성했을 때 터져 나오던 벅찬 웃음. 그 기억은 칩이 주입했던 그 어떤 화려한 경험보다 희미했지만, 비교할 수 없이 따뜻했다.


나는 기타를 꺼내 들었다. 여섯 개의 줄은 녹슬어 있었고, 조율은 엉망이었다. 칩이 있었다면 1초 만에 완벽한 튜닝을 마쳤겠지만, 이제 내게는 내 귀와 서툰 손가락뿐이었다. 한참을 낑낑대며 줄을 감고 튕기기를 반복했다. 불협화음이 방 안을 어지럽혔다.


마침내 대강의 조율을 마치고, 나는 코드를 잡아보려 했다. 손가락은 굳어 있었고, 뇌는 코드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운로드했던 완벽한 음악 지식은 사라졌다. 나는 서툰 손으로 음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이 아파왔다. 쇠줄이 연한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내 손가락은 고통을 비명처럼 호소했다.


"틱... 틱... 츠으윽..."


기타는 제대로 된 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저 죽어가는 소음만을 뱉어낼 뿐이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의 실패 끝에 포기하려던 순간, 겨우 하나의 음을 제대로 짚는 데 성공했다.


"띠잉—"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어딘가 삐뚤어지고 투박한 소리. 하지만 그 소리가 울리는 순간, 기타의 나무 몸통을 타고 전해진 진동이 내 가슴까지 울렸다. 내 심장은 칩으로 완벽한 교향곡을 연주했을 때보다 더 세차게 뛰었다.


그 소리에는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잊었던 꿈, 서툰 노력, 손가락 끝의 고통,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던 한순간의 의지. 다운로드했던 완벽한 연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내 땀과 심장의 떨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나의 소리'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진짜 삶은 완벽한 결과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서툰 실패와 그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기타를 켜고, 땀을 흘리고, 고통을 느끼고, 마침내 단 하나의 불완전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칩으로 살았던 그 어떤 완벽한 삶보다 진짜였다. 나는 아픈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다시 한번 줄을 튕겼다. 이번에도 소리는 엉망이었지만, 나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제15장: 우리들의 버그


기타 줄에 닿아 생긴 손끝의 물집이 터지고 아물기를 반복할 무렵, 나는 라이언을 찾아갔다. 그의 아파트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지난번 그를 찾아갔을 때의 오만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비효율적인 삶을 경멸했던 내가, 이제는 그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며칠 밤을 새운 듯 땀으로 젖은 얼굴의 라이언이 나를 보고는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어쩐 일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고, 서투르게 입을 열었다. "나... 칩 제거했어."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뷔페의 화려한 미로, 감정 없는 성공, 제이슨의 붕괴, 그리고 텅 빈 껍데기로 돌아온 나의 이야기까지. 말을 마치고 나는 물집이 잡힌 내 손가락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지금 내가 가진 전부야."


라이언은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비난도,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조롱도 없었다. 그는 그저 부엌으로 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내게 한 잔을 건넸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친구." 그 따뜻한 한마디에 굳어있던 내 마음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라이언과 함께 그의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아파트는 우리의 작은 우주가 되었다. 우리는 화이트보드에 아이디어를 미친 듯이 그려나갔고, 사소한 기능 하나를 두고 밤새 격렬하게 토론했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 캐릭터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밤샘 코딩으로 눈은 뻑뻑했고, 피곤함에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우리 사이에는 칩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진정한 열정과 동료애가 넘실거렸다. 그것은 땀과 커피, 그리고 끝없는 실패와 작은 성공으로 빚어낸 우리만의 것이었다.


며칠 뒤, 게임의 초기 버전을 들고 투자자를 만났다. 매끈한 슈트 차림의 투자자는 감정 없는 표정으로 우리의 발표를 들었다. 그는 게임 화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버그도 많고, 그래픽도 엉망이네요. 무엇보다 당신들의 개발 과정은 너무나 비효율적입니다. 칩을 쓰면 이 모든 걸 일주일 안에, 완벽하게 만들었을 텐데요. 왜 굳이 이런 원시적인 방식을 고집하나요?"


나는 그의 말에 대답 대신, 옆에 놓인 기타를 들어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서툴지만 정직한 코드를 하나 퉁겼다. '띠잉-'. 삐걱거리는 기타 소리가 차가운 회의실을 울렸고, 라이언은 그 소리에 맞춰 씩 웃었다. 투자자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 투자자에게 '버그'는 제거해야 할 오류일 뿐이지만, 우리에게 이 '버그'는 우리가 함께 밤을 새우고 싸워나간 흔적이자, 우리만의 이야기였다. 삶의 모든 버그와 불완전함은 칩으로 지워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만들고 해결해나가야 할 우리만의 **‘레시피’**라는 것을.


투자자가 떠난 뒤, 라이언이 말했다. "저 사람은 완성된 요리만 맛보려는 손님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요리사고."


나는 기타를 다시 고쳐 잡으며 웃었다. 그날 사무실에는 비효율적인 웃음과 따뜻한 커피 향, 그리고 희망의 멜로디가 가득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진정한 성취감과 행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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