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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뷔페 Part4

삶을 다운로드하는 시대

by sarihana

제4부: 감정 없는 퍼레이드

제10장: 완벽한 아들의 가면


나는 이 완벽함의 늪에 깊숙이 중독되었다. 외과의사 프로그램으로 얻은 공허한 성공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완벽함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텅 빈 마음을 채울 다음 요리가 필요했다. 일에서의 성공이 이토록 공허하다면, 어쩌면 가장 사적인 관계를 '완벽하게' 만들면 진정한 충족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지난번 방문 때 보았던 부모님의 걱정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빛은 나의 불완전함을 비추는 거울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인생 뷔페'의 가상 홀에 다시 접속했다. 수많은 경험 패키지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 '관계' 카테고리를 열었다. 그곳에는 '매력적인 연인', '카리스마 있는 리더', 그리고 '완벽한 아들'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완벽한 아들'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다운로드는 외과의사 때와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기술적인 지식 대신, 따뜻한 대화법,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 취향부터 어릴 적 추억까지, 수십 년간의 이상적인 아들의 모든 데이터가 내 뇌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마치 내 서툴고 이기적이었던 과거의 기억 위로 완벽하고 다정한 기억을 덧씌우는 과정 같았다. 나의 진짜 감정 회로가 정교한 프로그램으로 대체되는 기분이었다.


프로그램 설치를 마치고,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전화기는 필요 없었다. 의식을 집중해 어머니의 뉴럴 링크로 접속했다. 머릿속에서 부드러운 연결음이 들렸다.


"엄마, 저예요. 잘 지내셨어요?"


내 생각이 따뜻하고 안정된 감정 파형과 함께 어머니의 뇌에 직접 전달되었다. 목소리 톤, 걱정의 깊이, 애정의 농도까지 프로그램이 완벽하게 조율했다.


[시스템 제안: 어머니의 허리 통증에 대해 질문하십시오. 지난 통화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지난번에 허리 아프시다고 했는데, 좀 괜찮으세요? 제가 너무 신경을 못 써드렸네요."


어머니의 생각에서 기쁨의 파동이 느껴졌다. "어머,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니? 괜찮아, 많이 좋아졌단다. 아들이 이렇게 신경 써주니 다 나은 것 같네."


나는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따랐다. 아버지가 아끼는 난초의 상태를 묻고, 어머니가 최근에 보기 시작한 드라마의 줄거리에 대해 완벽한 리액션을 보냈다. 프로그램은 부모님과의 지난 모든 대화를 분석하여 최적의 대화 주제와 감정 반응을 실시간으로 제공했다. 나는 완벽한 아들이 되어 부모님에게 최적의 행복을 선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묘한 위화감이 감돌았다. 어머니의 생각이 내게 조심스럽게 전달되었다. "네 생각은 느껴지는데... 참 다정하고 좋은데... 왠지 예전의 온기가 없는 것 같구나. 아들, 정말 괜찮은 거니?"


그녀의 본능적인 직감이, 수만 줄의 코드로 이루어진 나의 완벽한 가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이 아무리 완벽한 대답을 전송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의 떨림까지는 흉내 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나의 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사라져버린 '나'의 부재를 느끼고 있었다.


통신을 끊자, 프로그램이 부여했던 다정함과 효심은 혀끝에 남은 설탕처럼 금세 사라졌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완벽한 아들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지만, 그 성공은 이전보다 더 깊고 차가운 공허함만을 남겼다. 나는 가면을 썼고, 그 가면은 너무나 완벽해서 이제는 나조차도 가면 아래의 내 진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가고 있었다. 부모님을 향한 나의 마음은 더 이상 서투르지만 따뜻한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완벽하게 계산된 데이터의 조각일 뿐이었다.





제11장: 끝없는 갈아타기


그 후 몇 주간, 나는 숙제를 해치우듯, 혹은 굶주린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경험 프로그램을 갈아치웠다. '완벽한 아들' 프로그램이 남긴 찝찝한 공허함을 지우기 위해, 나는 곧바로 '천재 변호사'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했다. 뇌리에 법전 수만 페이지가 순식간에 각인되었고, 혀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논리로 무장되었다. 법정에서 논리적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배심원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경험은 짜릿했다. 승소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프로그램은 내게 승리의 희열을 주입했다. 하지만 법정을 나오는 순간, 그 감정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내가 싸워서 얻어낸 승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잘 쓰인 대본을 읽은 배우에 불과했다.


공허함은 더 깊은 자극을 원했다. 다음은 '베테랑 비행사' 프로그램이었다. 다운로드가 완료되자마자, 나는 보잉 747기의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수백 개의 복잡한 계기판이 한눈에 들어왔고, 관제탑과의 교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짙은 먹구름을 뚫고 성층권으로 솟구쳐 오를 때, 창밖으로 펼쳐진 푸른 지구의 장관은 황홀했다. 하지만 착륙 후 시뮬레이션에서 로그아웃하자, 그 거대했던 세계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나는 다시 좁고 어두운 자취방의 현실로 추락했다. 황홀했던 비행의 감각 뒤에 찾아온 공허함은 이전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유명 록스타', '전설적인 셰프', '퓰리처상 수상 기자'... 화려한 경험의 퍼레이드는 계속되었지만, 모든 것은 홀로그램처럼 허망하게 느껴졌다. 땀과 눈물의 무게가 사라진 성공은 그저 공허한 데이터 조각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실패도, 좌절도 겪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되고 실행되었다. 칩은 내게 최고의 결과를 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야 할 노력과 성장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수많은 삶을 경험할수록, 역설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변호사의 날카로운 언변, 비행사의 냉철한 판단력, 음악가의 섬세한 감각이 모두 내 것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진짜 나를 말해주지 못했다. 내 원래의 기억, 서툴렀던 대학 시절의 추억, 부모님과의 사소한 다툼 같은 '나'를 구성하던 진짜 기억들은 다운로드된 화려한 가짜 기억들 아래로 깊숙이 묻혀버렸다. 나는 내 몸을 거쳐 가는 무수한 페르소나들 속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만이 안개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해졌다.


밤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와 욕실의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완전히 낯선 얼굴이 있었다. 그 얼굴은 내가 칩으로 살아왔던 모든 삶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변호사의 오만한 미소, 비행사의 무표정한 눈빛, 그리고 예술가의 공허한 시선이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내가 아는 내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낯선 존재를 향해 물었다. "넌 누구야?" 거울 속의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수십 개의 삶이 뒤섞인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수많은 삶을 살았지만, 정작 나의 삶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나를 잃고, 텅 빈 껍데기만 남은 유령이 되어 있었다. 이 화려한 뷔페에서 나는 폭식을 거듭했지만, 결국 내 영혼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제12장: 제이슨의 거울


그날 밤, 나는 악몽을 꾸었다. 화려했던 '인생 뷔페'의 가상 홀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진열장에 놓여 있던 경험 패키지들은 모두 썩어 문드러졌다. 내가 다운로드했던 외과의사 프로그램은 수술대 위에서 피를 흘리는 심장의 모습으로 변해 끔찍하게 맥동하고 있었고, '완벽한 아들' 프로그램은 산산조각 난 도자기 가면이 되어 검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뷔페의 음식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흉물이 되어 썩은 냄새를 풍겼다. 동료들과 부모님의 목소리가 "사기꾼", "넌 누구니"라며 나를 비난하는 메아리가 되어 무너진 홀을 울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때, 머릿속에서 알림이 울렸다. 제이슨의 누나에게서 온 긴급 뉴럴 메시지였다. 그녀의 불안하고 다급한 감정 파동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었다.


[제이슨이... 입원했어. 의사들이 '페르소나 연쇄 붕괴'라고 불러. 제발, 와서 좀 봐줘!]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나와 함께 칩 이식을 시작했던 동기 중 한 명이었다. 제이슨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정신과 병동의 격리실에 있었다. 창문을 통해 본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수십 개의 삶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가 짓던 장난기 가득한 미소나 찡그리던 버릇 같은, 제이슨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 제이슨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몸은 마치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여러 페르소나 사이를 오갔다. 갑자기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사랑 시를 읊조리다가('낭만주의 시인' 프로그램), 다음 순간에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복잡한 수식을 써 내려갔다('양자물리학자' 프로그램). 그의 뇌는 너무 많은 경험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고 동시에 실행하려다 충돌을 일으켜, 자아라는 운영체제 자체가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는 수많은 데이터의 노이즈 속에서 길을 잃은, 살아있는 유령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슨... 나야."


그 순간, 기적처럼 그의 눈에 잠시 초점이 돌아왔다. 수많은 노이즈를 뚫고, 진짜 제이슨이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마치 텅 빈 인형의 손처럼 힘이 없었다.


"이게... 이게 진짜 나라고 생각했어… 모든 게 완벽했거든. 내가 꿈꿨던 삶을 전부 다운로드했는데... 결국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는 희미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웃었다. "거울을 봐도 내가 없어. 그냥… 수많은 삶의 데이터 조각들만 남아있을 뿐이야. 난 다른 사람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유령이야."


그의 공허한 눈빛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말했다. "그건 진짜가 아니야. 네가 산 삶이 아니라고."


제이슨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한 명료함이 있었다. "그럼 네가 사는 삶이 진짜라는 증거는 뭐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질문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췄다. 경험을 다운로드하며 얻은 나의 화려한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라져버린 나 자신. 나는 제이슨의 거울 속에서, 나의 미래를 보았다. 그날 밤, 나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했다. 뷔페의 요리를 먹는 것에 중독된 나는, 이미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병실을 뛰쳐나와 복도를 달리다, 비상구의 차가운 강철 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외과의사의 냉철함과 변호사의 오만함, 그리고 내가 모르는 수많은 타인의 표정이 희미하게 겹쳐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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