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고
처음 친구들끼리 고깃집에 간 게 고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친한 친구들과 삼겹살집에 가기로 했다.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신이 났다. 가족들끼리 고깃집에 갔을 땐 불판 위에 고기와 마늘밖에 올린 적이 없었는데, 친구가 불판에 김치를 굽자길래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던 기억도 난다. 불판에 구운 김치는 정말 맛있었다.
보통 혼밥 레벨을 논할 때 '고깃집에서 혼밥 하기'는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꼽힌다. 그 어려움은 만족도의 격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고깃집에 가면 여러 사람이 불판 주위에 둘러앉는다. 그중에 누군가 나서서 집게와 가위를 잡는다.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마주 앉은 사람들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집게를 든 사람은 고기를 잘라서 일행들에게 나눠준다. 쌈을 싸 먹으려고 집게를 내려놓으면 옆사람이 얼른 뺏어서 고기 굽는 미션을 이어나간다. 또 누구는 떨어진 반찬을 채워달라고 직원을 부르고, 다른 누구는 물이나 술이 비었는지 잔을 계속 확인한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서로에게 계속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제 먹어도 되겠지? 더 작게 자를까? 불판 바꿔달라고 할까? 하나 더 시킬까? 후식은 냉면 아니면 찌개? 각자 먹을래 나눠먹을래?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질문이다. 중요해 보이지만 사소하기도 하다. 혼자서라면 이렇게 사소한 고민을 나누고 함께 결정하는 재미가 사라진다.
영화 <사람과 고기>에서 우연한 계기로 모인 세 주인공은 모두 독거노인이다. 그들은 빠듯한 살림에 고기 한번 제대로 먹기 힘들다며 한탄하다가 고깃집 무전취식이라는 무모한 행동을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실 그들은 '고기가 먹고 싶은' 것보다는 '고깃집에 가고 싶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주인공 중 한 명이 혼자서 식당에 가는 장면이 한번 나오는데, 그땐 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러니까 그 셋이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이 아니라 같이 고기를 지지고 구울 친구들이다. 104분의 러닝타임 내내 고깃집에 가는 장면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그 과정에서 세 사람은 단순히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존재감도 같이 채워진다.
하지만 그들의 식사는 지속될 수 없다. 무전취식이라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깃집에 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번에는 걸릴까?' 하고 긴장하면서 그들의 일탈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에 우리는 세 명의 주인공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과거에 뭘 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그리 내놓을만하지 않은 사연까지도 모두 알게 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향해서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긴장하게 된다. 이 사람들을 안다고 느끼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명과 암을 모두 보고, 그 사람을 보며 웃고 울고 난 후에도 '완전히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굉장히 어렵다. 팔짱을 끼고 멀리서 바라보기엔 이미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들이 고기와 술을 먹으면서 점점 풀어내는 과거사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가정폭력으로 추정되는 가정 내 불화, 여성편력, 사실혼 관계 등 눈이 찌푸려지고 손가락질을 받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충격적인' 면모는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 이야기를 하는 얼굴들이 주름지고 지쳐서인지, 이미 오래되고 그들이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버려서인지도 콕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일까, 결국 그들의 범법행위에 대한 판결을 내릴 때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라는 취지로 서두를 여는 판사의 말에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했고, 그 중에 안좋은 선택들도 있었고, 여전히 그 선택 안에서 살고있기도 하다. 스스로 나서서 사회에 무언가를 증명하려 한 적도 없으며, 그저 하나의 삶을 계속해서 헤쳐나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