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추억들
내 기억 속에 가장 오래된 흥행 영화는 <미이라> 시리즈다. 어릴 때 영화를 접하는 경로는 TV나 동네에 딱 하나 있는 비디오 대여점이었다. <미이라> 비디오는 이례적으로 서너 개를 들였는데 그것마저도 구하기가 어려워서 맨날 들락날락거리면서 물어봐야 했다. 드디어 <미이라>를 빌린 날 엄마와 맞은편 건물에 있는 마트에 가서 전자레인지 팝콘을 샀다. 설명서에 적힌 대로 빨간 동그라미가 아래에 가도록 해놓고 봉투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구경했다. <미이라>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금지된 피라미드에 들어간 등장인물이 풍뎅이 떼에 뒤덮이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린이에게는 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다음에는 공포영화 열풍이 불었다. <링>이 시작이었다. 비디오-브라운관 TV 시대에 <링>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귀신이 TV 화면에서 기어 나올 때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당장 테이프를 빼야 할 것 같은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링> 이후에 일본에서 공포영화가 연이어 여러 개 나왔다. 밤에 모여서 다 같이 보겠다고 친구 집에 모여서 호들갑을 떨었다. 공포영화는 무서운 재미로 보는 거라서 같이 보는 사람이 무서워해야 제대로 보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단체관람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새로운 <반지의 제왕> 영화가 나올 때마다 동네 문화센터 상영관이 미어터졌다. 줄을 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계단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희망이 없어 보였던 전투에 지원군이 오는 순간, 그리고 레골라스가 등장하는 순간마다 몇백 명이 다 같이 환호를 했다. 2002년은 단체 관람이 제철이었다.
대전에 살았던 대학생 때는 취향을 찾아 여러 영화관을 다녔다. 독립영화에 관심이 많은 대전 시민이라면 가본 적은 없어도 들어는 봤을 곳이 대전 아트시네마다. 대전역에서 멀지 않아서, 허구한 날 기차를 탔던 내 동선에 딱 맞았다. 대전에 독립영화를 볼 만한 상영관은 그리 많지 않은데, 모두 내가 살던 동네와는 꽤 멀었다. 대전의 시내교통은 은근히 불편함이 많다. 환승 연계성이 좋지 않고 버스 배차간격이 보통 15분 내외라서, 버스를 갈아타는 이동경로는 30분 여유를 둬도 늦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대전역을 이용하는 일정에 맞춰서 대전 아트시네마에 가는 게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대전 아트시네마는 4-5층짜리 상가 건물들이 마주 보고 선 길에 위치한, 작은 영화관이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운터에 잠이 많은 고양이가 앉아있었다. 평일에 가면 나 혼자, 또는 서너 명만 점점이 차는데도 휑하지 않은 단출한 상영관이었다. 하루는 유난히 객실 공기가 안 좋은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렸다. 머리가 띵한 채로 <우리 선희>를 보러 가서 술을 마시고 주인공들이 하는 대화를 듣다가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가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오래간만에 정동진에서 단체관람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처음 간 정동진은 첫인상부터가 시원했다. 플랫폼이 딱 하나인 정동진역에 내리자마자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정동진리는 작은 동네라 웬만한 곳들은 다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 <정동진 독립영화제>가 열리는 정동초등학교도 해변에서 도보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해가 떨어질 즈음 야외 상영을 시작하는데, 운동장에 의자만 깔리는 게 아니라 돗자리도 깔린다. 맥주와 간식을 먹으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건지, 여름밤에 운동장에 모여서 모기향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보는 영화라 그런지 관객들의 리액션이 유독 좋다. 재미있고 통쾌한 장면이 나오면 거침없는 환호성이 터진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나고 무대에 올라오는 감독들의 표정도 밝다. 상영이 끝나고 돌아가는 사람들 얼굴에 ‘다음에 또 와야지’라고 써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1년 중에 가장 더울 때 열리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굳이 따져보면 혼자서 본 영화가 훨씬 많을 것이다. 혼자서 보기에 더 좋은 영화도 있고, 그래서 혼자 수도 없이 많이 본 영화도 몇 편 있다.
그런데 '영화 보는 거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 떠오르는 건 왜인지 가족들과 전자레인지에 팝콘을 데워먹던 날, 문화센터에서 동네 사람들과 전투 장면을 보고 박수치던 순간, 정동진의 여름밤 같은 기억들이다.
어쩌면 영화는 여러 사람들이 다 같이, 여러 사람이 제각각 보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볼 때 장르가 조금 바뀌는 것 같다. 그게 영화의 마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