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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에 대한 서운함

눈 한번 깜빡인 순간

by 은구


얼마 전에 고등학교 친구 S와 연락이 닿았다. 내가 일을 쉬고 있다고 하니까, 자기도 오래 쉬었다가 다시 일을 한다면서 같이 놀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남한산성에 가서 닭곰탕을 먹고 산책을 했다. S의 차를 타고 성남 구시가로 이동해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고 코인 노래방에 갔다. ‘그 시절’ 선곡만 하기로 합의하고 박효신 투에니원 김범수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몇 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너무나 매끄러웠다. 문득 내 마음을 계속 누르고 있었던 이야기를 S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 재작년에 눈 수술을 네 번 받았어. 여기를 수술하니까 저기에 문제가 생기고, 왼쪽을 다 고치니까 오른쪽이 갑자기 안보였거든. 나는 남한테 서운한 적도 없고 누가 서운해하는 거 이해를 못 했는데 그때는 정말 서운했어.
- 운명에 대한 서운함을 느꼈구나.
- 맞아.

운명에 대한 서운함. 떠올려놓고 왠지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화두를 꺼내자마자 S의 입에서 바로 정답이 나왔다. 새삼 깨달았다. 이래서 친구가 됐구나.



그땐 정말 서운했다. 사실은 아직도 서운하다. 아직 젊다며 1-2년을 미루다가 드디어 백내장 수술을 받고 말 그대로 개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미색을 흰색이라 생각했고, 이사한 동네의 밤길이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다. 저녁에 공원을 산책하다가 낮게 뻗은 나뭇가지에 부딪치기도 했다. 시야가 흐릿해서 작은 글씨는 문맥을 읽고 때려 맞히는 게 습관이 됐다. 오타가 늘었다. 원래도 타자를 잘 치는 편이 아닌데, ‘ㅗ’와 ‘ㅜ’ 나 ‘ㅁ’과 ‘ㅂ’이 구분이 잘 되지 않아서 오타를 내놓고도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백내장 수술을 두 번(양쪽에 한 번씩) 받고 나니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렌즈도 안경도 없이 밝고 선명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했다. 가끔가다 한 번씩 눈을 깜빡일 때 꼭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처럼, 유격이 있어서 한 번에 맞물리지 않는 문을 닫을 때처럼 시야가 덜컹거렸다. 며칠이 지나도 그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보름쯤 지났을까 망막박리가 와서 응급수술을 받았다.


더 불안해했어야 하나.


하나마나한 후회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 한편을 붙들고 있는 질문이다. 늘 대범하고 싶고, 후회하고 싶지 않고, 사람이나 상황에 서운해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너무 오래 돌아보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눈 한번 깜빡이는 것까지도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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