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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는 환웅님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삼사오가에게 전달하여 실행되도록 하는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는데, 글자가 없어서 모든 일을 구술로 전달하려 하니 여러모로 힘이 들었다. 환웅님께 편리한 글자를 만들어 달라고 청을 올리니 자신도 환인천제님으로부터 하교받은 천부경의 말씀이 잊히지지 않고대대로 전달될 수 있는 글자를 찾고 있었다며 혁덕을 만나 상의해 보라고 천거하였다.
혁덕은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인인데 경험이 많고 지혜로워서 현자라 칭송되고 있는데 천문과 지리에 밝고 태극과 오행에 대한 공부가 높은 수준에 닿아 있었다.
환웅님으로부터 천명과도 같은 피할 수 없는 과제를 부여받은 혁덕은 고민과 사색을 거듭하였다. 평소 선조들이 그려놓은 암각화나 토기에 새겨진 부호들을 보고 그 뜻과 내용을 해석하고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던 혁덕은 그 그림들 속에서 사람들이 사물을 보고 느끼는 보편적인 생각과 공통적인 표현의 단서들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지러운 머리도 식힐 겸 사냥터에 나간 혁덕은 우연히 사슴의 발자국을 보게 되었다. 그 흔적은 어느 뭇사람이 보아도 사슴의 발자국임이 분명했고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방향으로 뛰어간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혁덕의 머릿속에 밝은 빛 한줄기가 흘렀다.
그렇다. 문자는 약속이다.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표현하는 그림과는 다르게 문자는 사용하는 사람들 상호 간에 약속이 바탕되어야만 글씨가 표현하는 뜻을 서로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비로소 소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혁덕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친숙한 모양으로 불편하거나 부족함이 없는 최소한의 가짓수로 문자를 만들었다. 태극과 오방에서 으, 이, 아, 어, 오, 우 여섯 가지 모음을 만들고, 원방각 형상에서 10가지 자음을 만들어 16가지 문자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글자를 사람들은 사슴에서 비롯됐다 하여 녹두문자라 불렀다.
녹두문자를 받아 든 마가는 지체 없이 환웅님께 올라가 보고하였다. 환웅님은 기뻐하시며 삼사오가를 비롯하여 관직을 맡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익혀서 사용하도록 명하셨다. 혁덕에게는 신지라는 관직을 내리시고 나라의 모든 문서를 감독하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신지선인이라 부르게 하여 그의 높은 덕을 칭송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게 하였다.
이때 혁덕에게 내려진 신지라는 직책은 다분히 명예직이었으나 훗날에는 정식 관직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주로 왕의 명령을 하달하고 사료를 정리하는 사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대대로 혁덕에 버금가는 학식을 갖춘 큰 스승 같은 현인들이 이 직책에 임명되어 천왕님들을 보좌하고 백성들을 다스렸다
맡은 바 일의 성격상 항상 문자와 함께 일을 하는데 나라가 커지고 여러 부족들이 통합하게 되면서 서로 쓰는 말들이 같지 않아서 처음 만든 글자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말들이 생겨나게 되고 새로운 글자를 하나 둘 추가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렇게 추가된 글자들이 지나치게 많아져 편리함 보다는 혼란스러움이 발생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살아가는 모습도 변하였는데 문자는 시대를 담아내지 못하고 뒤처져 있다는 우려가 학자와 현인들 사이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지 을보륵은 신지비사를 녹두문자로 기록한 고설과 머리를 맞대고 신시대에 맞는 글자를 재창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모래에 찍힌 새 발자국을 보고 여러 개의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녹두문자와 함께 사용하게 하였다. 혁덕이 만든 녹두문자 16가지를 기본 골격으로 하여 새로 추가된 글자들 중에서 꼭 필요한 글자는 그대로 유지하고 잘 쓰이지 않거나 쓰기가 불편한 글자들은 정리하기로 했다.
여러 지역의 현인들의 조언을 참고하고 직접 실생활에 쓰이는 말들을 조사하며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글자 22개를 추려내어 모두 38개의 문자를 다시 정하여 모든 관리들과 사람들에게 사용하게 하였다.
이 문자는 역대 신지들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하여 신지문자라 불리었는데, 일부 지역에서 가림토 또는 가림다 문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가림다는 가리다 가려내다는 뜻이 있는데 글자들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 간추려 뽑아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가림다 문자라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