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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smiths Apr 10. 2023

국밥 한 그릇에 호란의 역사를 떠올리다

- 쌍령해장국과 병자호란

* 게으르고 과문하여 글을 잘 올리지 못함에도 구독자분이 생기셔서, 새롭게 포스팅해봅니다. 제 개인 공간에 쓴 글인데 옮겨기재해 봅니다. 재미나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쌍령해장국. 경기도 광주 쌍령에 있지 않고 우리동네에 있다. 아마 본점은 쌍령에 있거나 시작했을 듯하다.

동네 맛집이라 자주 오는데, 올 때마다 쌍령전투가 떠오른다. 쌍령전투는 병자호란 때 일어난 유명(?)한 전투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후금군에게 대패했다. 이후 후금은 만리장성을 넘기 전에 배후의 조선을 단속해야했다. 정묘호란에서 한양을 기습하며 조선을 한차례 제압한 후금(이하 청)은 하나의 교훈을 깨달았다. 조선을 완전히 제압하려면 조선왕이 강화도로 건너기 전에 사로잡아야했다.


마침내 병자호란이 터졌다. 단 13일(?) 만에 청군의 선발진은 한양 서쪽에 다다른다. 정묘호란 이후 서북의 성벽을 정비하고 군사를 보강했지만, 뛰어난 길잡이를 가진 청의 정예군은 백마산성의 임경업, 김자점이 거느린 조선정예 서북군을 요리조리 피해 순식간에 한양까지 도착한다. 이들의 돌격은 변방 의주에서 침공을 알리는 파발과 불과 하루 차이 밖에 안났을 정도로 신속한 전격전이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만주족 기병

청군은 이번에 재빨리 강화로 가는 한양서쪽을 봉쇄한다. 왕비와 왕자들은 모두 강화로 피신했으나 조선왕 인조는 강화로 가려다가 늦었음을 깨닫고 부득불 남한산성으로 몽진한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한다.


이 때 평안도, 강원도 및 삼남의 근왕군들이 집결하여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진격해 온다. 이들이 온다면 남한산성을 둘러싼 청군은 안 쪽의 남한산성군과 밖의 팔도 근왕군에 둘러쌓인다. 앞뒤로 공략하는 것이 조선의 전략이었다.


청군은 병력이 매우 적었다. 이들은 팔도의 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 오기 전에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여 각개 격파하기로 한다.

영화 남한산성, 산성으로 몽진하는 모습

가장 먼저 남함 산성을 향해 달려온 조선군은 강원군, 정확히는 원주군이었다. 이들은 지금의 하남시에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다가 검단산에서 격파된다. 이에 강원군은 주춤하여 여주 파사산성에 주둔하며 움츠러든다.


그 다음 남한산성과 가까운 충청군이 올라온다. 이들은 죽주산성에 잠시 멈췄다가 역시 선발군이 용인 험천전투에서 박살난다. 험천은 지금 분당 네이버와 가까운 곳인데 미금과 오리 사이의 천이며 분당 탄천으로 합쳐진다. 전에 살던 동네라서 무척 익숙한 천변이다. 이후 잔존한 충청사단은 남쪽에서 올라오던 경상군에 합류한다. 일부는 전라군에 합류하여 힘을 보탠다.


영화 남한산성, 조선군 조총부대

경상군은 광주(경기도)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지금도 쌍령 근처 차를 달리면 남한산성 방면을 가르키는 도로표지판이 계속 나온다. 쌍령은 두 개의 작은 산이 있어서 쌍령이라고 부른다.


남한산성이 가까워질수록 청군이 기습해올지 몰라서 경상군은 쌍령에 진을 친다. 쌍령 사이에 협로가 있어서 양쪽 동산 위에 진을 치기로 한다. 협로로 청군이 온다면 양쪽 봉우리에서 협격할 수 있다는 멍청한 논리였다. 적군이 주둔한 사이의 협로로 들어올 멍청한 군대는 없다. 청군은 당대 최강 기마군이었다. 경상군이 이런 이러석은 결정을 내린 것은 문관출신의 탁상 위 전략가가 실전을 모른 채 직위를 이용해 감행한 결과였다.


청군은 이 약점을 잘 파고 들었다. 쌍령에 각기 주둔한 경상군의 진지를 차례로 격파한다. 당시 화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한 쪽 고개의 경상군은 허무하기 무너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경상군은 물러나서 재정비하거나 일부는 전라군으로 합류한다. 쌍령해장국을 먹을 때 떠오르는 쌍령전투는 바로 이것이다. 슬픈 선조들의 이야기지만 막상 먹을 땐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먹는다.

영화 남한산성, 조선 조총부대와 청의 기마부대의 교전

그럼 마지막 삼남의 근왕군 전라군은 어땠을까? 유일하게 승전을 거두었다. 성남과 수원, 용인에 걸쳐있는 광교산에서 압도적 화력을 퍼부우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광교산 전투이다. 광교산 역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근처라서 삼남의 근왕군 격전지가 모두 내 주변과 가깝다.


암튼 광교산에 집결한 전라군은 광교선 봉화를 피워 남한산성에 근왕군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광교산의 지세와 화력의 물량을 퍼부으며 승리를 거머쥔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전라군은 더 이상의 지원이 없이는 진격할 수 없었다. 힘을 모두 소진한 전라군 역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선 삼남근왕군이 패하자 인조는 성문을 열고 항복, 삼전도로 가서 삼궤구고두례를 한다. 삼전도 즉 지금의 잠실 삼전동 역시 내가 결혼직전에 살던 곳이다. 내가 살던 집의 신주소에는 ‘삼학사’로 몇 번지로 끝난다.

삼궤구고두례하는 인조

한편, 평안도 근왕군 역시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진격해왔었다. 역시 진군 중에 청군을 만난다. 전장을 선택하는데 두 장수가 뜻이 맞지 않았다. 문관출신 홍명구는 기마부대를 상대로 평지에 진을 치자고 하고 무관출신 유림은 산에 치자고 한다. 결국 홍명구는 들판에 유림은 산에 병력을 나눠 진을 치게 된다.


들판에서 진을 친 홍명구의 군대는 청의 철기를 맞아 분쇄된다. 산에 주둔한 유림은 홍명구군을 도울까도 생각했지만 산을 내려오면 대오가 무너져 즉시 청군에게 당할 것이기 때문에 돕지 않았다. 평지교전에서 승리한 청군은 이후 말머리를 돌려 언덕으로 올라온다. 그러나 지형을 바탕으로 전투한 유림이 승전을 거둔다. 물론 홍명구군이 청군을 소진시킨 탓도 있지만, 어쨌든 지리적 이점을 살린 유림은 버텨냈고 승리했다.


그러나, 평안도 근왕군의 승리는 수포로 돌아갔다.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미 인조가 항복한 뒤였기 때문이다. 훗날, 유림은 평지의 홍명구군이 고전할 때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받는다.

김자점 초상화

가장 주력군으로 여겨졌던 서북군을 이끌던 도원수 김자점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서북 지역에서 성을 지키며 웅거하다가 뒤늦기 움직이다가 토산에서 청의 명장 도로곤의 군대에 걸려 증발한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정묘호란 때 인조의 강화도 피신 때 잘 보필한 공로로 도원수가 됐었다. 그러니 도원수의 역할을 잘 할 리 없다.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그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인조 개인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도원수로서 실책을 용서받고, 다시 권력의 중심부로 옮겨왔고, 훗날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여되는 등 간신의 반열까지 오르게 된다.


왜란 이후 체력이 거덜난 조선은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하는 청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쌍령해장국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맛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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