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 밤, 나에게 고맙기로 했다

더 이상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는 삶을 위한 연습

by 하레온

오늘 하루를 끝내며, 나는 왜 나에게 냉정할까


하루의 끝,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우리는 가장 혹독한 심사위원이 됩니다. 현관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는 그 순간. 휴대폰 불빛 아래로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회의실에서 미처 다듬지 못했던 말, 상사에게 보낸 메일 속의 사소한 실수, 조금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분명 아침 일찍 일어나 붐비는 지하철을 견뎠고,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했으며, 까다로운 관계들 사이에서 애써 미소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노력들은 당연한 것이 되고, 사소한 부족함만이 마음을 파고듭니다. 퇴근길의 성취감은 희미하고, '오늘도 결국 이 정도밖에 못했나' 하는 자책감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는 꽤 너그럽습니다. 친구의 실수에는 "그럴 수도 있지", "충분히 잘했어"라고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하지만 유독 자신에게만큼은 냉정합니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가장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줍니다.


오늘도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조용히 나를 대신해 이 모든 하루를 버텨주었습니다. 무너지고 싶은 순간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름 아닌 '오늘의 나'입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자신에게만 인색한 걸까요.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나에게, 따뜻한 고마움 한마디 건네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요.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제는 감사의 방향을 조금 바꿔야 할 때라고 말입니다.




1부. 우리는 왜 스스로에게 인색할까: 뇌는 결핍에 집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Image_fx - 2025-10-30T210956.204.jpg 구름(가벼운 긍정)은 흘러가고, 잉크(부정)는 달라붙는 이미지


우리가 스스로에게 인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도, 성격이 유별나게 부정적이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뇌의 작동 방식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릭 핸슨(Rick Hanson)은 우리의 뇌가 "나쁜 경험에는 벨크로(찍찍이)처럼 달라붙고, 좋은 경험에는 테플론(코팅 팬)처럼 미끄러진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입니다. 인류의 조상들은 생존을 위해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습니다. 덤불 속의 예쁜 꽃보다는, 그 옆에 숨어있을지 모를 맹수의 위협에 집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 생존 본능은 현대인의 뇌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이룬 아홉 가지 성과보다, 놓친 한 가지 실수에 더 강력하게 집착합니다. 직장에서 받은 칭찬의 기억은 금세 휘발되지만, 누군가의 비판적인 눈빛은 며칠이고 머릿속을 맴돕니다. 하루 종일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보다, '이 정도로 충분할까?'라는 불안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늘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게으르거나 완벽주의자라서가 아닙니다.


그건 뇌가 본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결핍에 집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뇌를 가지고, 성취를 요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오래된 뇌의 습관에 끌려다니는 대신, 의식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뇌의 기본 설정값을 조금 바꿔보는 겁니다.




2부. 감사의 방향을 나에게로: '자기 감사'가 주는 감정 회복의 과학

Image_fx - 2025-10-30T211051.598.jpg 나침반의 바늘이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중앙)을 향하고 있는 모습, 자기 감사를 상징하는 이미지


우리는 '감사'라고 하면 흔히 외부를 향한 마음을 떠올립니다. 나를 도와준 타인, 좋은 환경, 운이 좋았던 순간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감사의 가장 중요한 대상 하나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에게 고마워하기’, 즉 '자기 감사(Self-Gratitude)'는 단순히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자기 위로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나의 존재와 노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남에게 감사할 때 우리는 관계를 회복하지만, 나에게 감사할 때는 존재를 회복합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뇌 과학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할 때, 뇌의 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낮아집니다. 그런데 이 감사의 대상을 '나'로 바꿀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뇌의 보상 시스템(도파민, 세로토닌)이 자극되는 것입니다.


이는 외부의 칭찬이나 인정 없이도, 스스로 내적 동기와 행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던 마음이, 스스로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 루이스 헤이는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자신을 인정할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다그쳐왔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비판이 아닌 인정에서 시작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인간에게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선택권이 있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습관적인 '자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의식적인 '자기 감사'를 선택할 것인가.


삶은 내가 나를 고마워해줄 때, 비로소 내 편이 되어주기 시작합니다.




3부. 위로가 아닌 인정으로: 오늘의 나를 껴안는 실천

Image_fx - 2025-10-30T211120.325.jpg 두 손이 스스로를 감싸 안거나 작은 씨앗을 소중히 들고 있는 모습, 자기 인정을 상징하는 라인 아트


‘나에게 고마워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것을 '자기 위로'와 혼동합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다독이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닿아야 할 곳은 위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인정(Recognition)'입니다.


위로와 인정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위로는 잠시 마음을 달래지만, 인정은 나를 단단하게 만듭니다.


위로는 감정의 끝에서 멈추지만, 인정은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줍니다.


"오늘 힘들었지"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네가 해낸 것은 이것이야"라고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주는 것이 인정입니다. 인정은 결과가 아닌 과정을, 완벽함이 아닌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정'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아주 짧은 순간, 나에게 고마운 점을 찾아내는 작은 의식(Ritual)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하루, 나를 인정하는 3줄 감사 일기]


(존재에 대한 감사) : 오늘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준 나에게 고맙다.


(과정에 대한 감사) : 껄끄러운 상사의 말을 묵묵히 버텨낸 나의 인내심에 고맙다.


(작은 성취에 대한 감사) : 지쳤지만 나를 위해 건강한 샐러드를 챙겨 먹은 나에게 고맙다.



처음에는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단한 성과를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뜬 것, 끼니를 챙겨 먹은 것, 하루를 무사히 끝마친 것. 이 모든 당연해 보이는 것들 뒤에는 사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나의 노력’이 숨어있습니다.


또 다른 실천법은 '자기 대화'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책의 순간이 찾아올 때, 그 목소리를 '감사'의 목소리로 바꿔보는 연습입니다.


(비판) "왜 이것밖에 못했어? 또 실수했네."


(감사) "이만큼이라도 해낸 게 어디야. 그리고 실수 덕분에 하나 더 배웠네. 애썼다, 나 자신."



이 작은 연습이 쌓일 때, 우리는 스스로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마지막 한마디


우리는 더 나은 내일, 더 성장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채찍질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내일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나’입니다. 매일 밤 스스로를 자책하며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다음 날 아침 활기차게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은 당신에게 거창한 자기계발이나 완벽한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과 당신 자신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제안합니다. 세상 누구보다 당신의 편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만족스러운 성과를 냈을 수도, 혹은 실수투성이의 하루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겪어내며 지금 여기까지 온 당신에게, 가장 따뜻한 말을 건넬 시간입니다.


내일의 나를 바꾸는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닙니다.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단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오늘도, 고마워.”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9화오늘 하루, 이만하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