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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걸으면서 일할까

스티브 잡스부터 니체까지, 창의성을 깨운 DMN의 힘

by 하레온

막힌 생각은 앉아서 풀리지 않는다


오늘도 모니터 앞에서 몇 시간을 보냈나요. 커서는 깜빡이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갑니다. 아이디어를 쥐어짜 보지만, 익숙한 생각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쏟아지는 정보, 끊이지 않는 알림, 마감의 압박 속에서 우리는 정작 '내 생각'을 할 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지적 과부하'라 부릅니다.


창의적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뇌는 이미 방전 상태입니다. 효율과 속도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법' 자체를 잊어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막혔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세게 책상을 내리치거나, 더 많은 자료를 검색합니다. 하지만 답은 그곳에 없습니다. 적어도, 새로운 답은 없습니다. 막힌 생각은 앉아서 풀리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답은 가장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행위, 바로 '걷기'에 있습니다.


이 글은 '잘 쉬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생각하는 법'에 관한 가장 과학적인 제안입니다. 산책은 단순한 휴식이나 기분 전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열된 뇌의 스위치를 끄고, 창의적인 연결을 담당하는 회로를 가동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고의 리부팅 도구'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간입니다. 뇌를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뇌가 다르게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는' 시간입니다.


길 위로 나설 때, 비로소 우리의 뇌는 걷기 시작합니다.




1부: 뇌는 걷는 동안 연결된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의 비밀

Image_fx - 2025-10-30T212632.506.jpg 어두운 배경 속, 경직된 TPN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DMN 뇌신경망의 활성화를 시각적으로 대비한 이미지


우리의 뇌에는 두 가지 주요 작동 모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업 긍정 네트워크(Task-Positive Network, TPN)'입니다. 이름 그대로, 우리가 당면 과제에 집중할 때 활성화됩니다. 보고서를 쓰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집중의 뇌'입니다. 현대 지식노동자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이 TPN 모드로 살아갑니다. 효율적이지만, 에너지를 극심하게 소모합니다.


문제는 TPN이 과열될수록 뇌는 새로운 연결을 만들 틈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이 TPN이 잠시 멈춘 '틈'에서 시작됩니다.


이때 스위치가 켜지는 두 번째 모드가 있습니다. 바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입니다.


DMN은 우리가 특별한 목적 없이 '멍때릴 때' 작동하는 뇌의 기본값(Default) 상태입니다. TPN이 외부 세계로 향한다면, DMN은 내면의 세계로 향합니다. 하지만 DMN은 결코 쉬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DMN이 활성화되면, 뇌는 비로소 내면의 정보들을 자유롭게 탐색하고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들추고,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며,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정보들(어제 읽은 책의 한 구절, 스쳐 지나간 풍경, 오래된 기억의 파편)을 무작위로 연결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하!'하는 통찰의 순간, 창의적 연결이 폭발하는 뇌과학적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걷기'일까요? 산책은 TPN을 강제로 끄고, DMN을 활성화하는 가장 간단하고 강력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걸을 때, 우리 몸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지만, 뇌는 목적 지향적 사고에서 해방됩니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 스쳐 가는 바람, 느리게 변하는 풍경... 이 '낮은 수준의 감각적 자극'은 뇌를 완전히 잠들게 하지도, TPN을 가동시키지도 않으면서 DMN이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돕습니다. 뇌가 '탐색 모드'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한 연구는 이 효과를 명확히 증명합니다. 연구팀은 피실험자들을 앉아 있을 때와 트레드밀에서 걸을 때로 나누어 창의성을 테스트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걷는 동안, 그리고 걷고 난 직후의 창의적 발상 능력은 앉아 있을 때보다 평균 60%나 증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혈액순환이 잘 되어서가 아닙니다. 걷기는 '사고의 질' 자체를 바꿉니다. 앉아서 하는 사고가 기존의 답을 찾는 '수렴적 사고'라면, 걸으면서 하는 사고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확산적 사고'입니다.


산책은 휴식이 아닙니다. 가장 적극적인 '생각의 재배치' 작업입니다.




2부: 위대한 사상가들이 길 위에서 생각한 이유

Image_fx - 2025-10-30T212733.637.jpg 길 위에 스티브 잡스의 안경, 니체의 콧수염 등 위대한 사상가들의 상징물이 발자국처럼 찍혀 있는 은유적 이미지


역사상 가장 빛나는 통찰의 순간들은 종종 길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위대한 사상가와 혁신가들은 본능적으로 '걷는 뇌'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걷는 미팅(Walking Meeting)'을 즐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이나 심각한 대화가 필요할 때, 상대방을 실리콘밸리의 거리로 이끌었습니다. 회의실의 딱딱한 의자와 테이블이라는 수직적 구조를 벗어나, 나란히 걸으며 수평적으로 대화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깊은 뇌과학적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걷기는 방어적인 TPN의 작동을 멈추고, DMN을 활성화시켜 닫힌 생각을 열어젖힙니다. 잡스는 걷기의 리듬 속에서 상대방의 뇌와 자신의 뇌가 자유롭게 '연결'되는 순간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철학자 니체에게 산책은 생명줄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걸으면서 떠오른다"고 단언했습니다. 지독한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던 그에게 걷기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사유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스위스 실스마리아의 산길을 하루 8시간씩 걸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고독한 걷기의 리듬은 그대로 그의 문장 리듬이 되었고,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토벤은 매일 오후 빈 외곽의 숲을 몇 시간이고 거닐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항상 작은 노트와 연필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숲을 걷다가 '전원 교향곡'의 선율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악보를 그렸습니다. 그에게 산책은 자연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자, 내면의 소리들이 DMN 안에서 자유롭게 '연결'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문학에도 '걷는 사상가'가 있습니다. 시인 이상(李箱)은 근대화된 경성의 거리를 목적 없이 배회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거리의 산책자'라 칭했습니다. 그가 마주한 도시의 소음, 무질서한 간판, 스쳐 가는 낯선 얼굴들은 그의 뇌 속에서 분해되고 재조립되었습니다. 이상의 천재적이고도 난해한 시어(詩語)들은, 바로 이 '산책하는 뇌'가 무의식적으로 연결해낸 파편들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모두 알았습니다. 책상 앞에서 쥐어짜는 생각은 경직되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생각은 유연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걷기는 뇌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고, 갇혀 있던 생각의 회로를 복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3부: 걷기의 리듬이 사고를 재배선한다

Image_fx - 2025-10-30T213012.843.jpg 엉킨 실타래가 발자국을 거쳐 정돈된 선으로 재배열되는 과정을 통해 생각의 재배선을 상징하는 이미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걸어야 할까요? 무작정 걷는다고 해서 DMN이 마법처럼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의적 산책에는 뇌의 상태를 의도적으로 바꾸는 3단계의 논리적 구조가 필요합니다.


1단계: '방심'의 시간 (사고의 여백 확보)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단계입니다. 우리는 '생산성'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창의적 산책의 첫 번째 조건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의지', 즉 '방심(放心)'입니다.


일단 붙잡고 있던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합니다. TPN을 자극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멀어져야 합니다.


휴대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거나 아예 두고 나와야 합니다. 팟캐스트나 음악도 잠시 꺼두는 것이 좋습니다. 뇌가 외부의 정보 주입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이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여백이 확보되어야만, 뇌는 비로소 DMN 모드로 전환될 준비를 마칩니다.


2단계: '무의식적 연결' (연관 아이디어 재배선)


방심 상태로 걷기 시작하면, 뇌는 무의식적 연결을 시작합니다. 일정한 걷기의 리듬은 뇌파를 안정시키고(알파파 상태), DMN을 활성화합니다.


이때 뇌는 저장된 기억과 경험, 방금 스쳐 지나간 풍경, 어제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무작위로 뒤섞습니다. 전혀 상관없던 A와 B가 만나 C라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의식'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걷기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뇌가 스스로 '재배선'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3단계: '귀환 후 기록' (산책의 에너지를 언어로 고정)


길 위에서 만난 아이디어는 휘발성이 강합니다. 붙잡지 않으면 공기처럼 사라집니다. 산책에서 돌아온 직후, 그 '연결'의 에너지가 식기 전에 즉시 기록해야 합니다.


니체와 베토벤이 늘 노트를 지녔던 이유입니다. 완벽한 문장을 만들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떠오른 단어, 이미지, 느낌, 질문. 그저 파편이라도 붙잡아 두어야 합니다. 이 '기록'의 행위는 무의식의 영역(DMN)에 있던 아이디어를 의식의 영역(TPN)으로 가져와 구체화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창의적 산책 워크북: 오늘 당장 시작하기]


거창한 계획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가이드입니다.



'목적 없는 20분' 걷기: 우선순위는 '시간'이 아니라 '목적 없음'입니다. 운동이나 출퇴근과는 다릅니다. 단 20분이라도 '아무 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봅니다.


'휴대폰 없이' 걷기: 창의적 산책의 가장 큰 적은 스마트폰입니다. 단절의 시간을 견뎌내야 진정한 연결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불안할지도 모릅니다. 그 불안함이 바로 뇌가 TPN에 중독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일정한 리듬'으로 걷기: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내 몸이 편안함을 느끼는 일정한 리듬을 찾습니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발의 감각에 집중해봅니다. '왼발, 오른발.' 단순한 리듬이 복잡한 생각을 잠재웁니다.


'단어 3개' 메모하기: 산책을 마친 직후, 자리에 앉아 1분만 투자합니다. 걸으면서 떠올랐던 것 중 가장 인상적인 '단어 3개'만 적어봅니다. (예: 파란색 대문 / 커피 향기 / 왜 그랬을까?) 이 단어들은 DMN이 건져 올린 무의식의 조각들이며, 다음 아이디어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에필로그: 좋은 아이디어는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난다


우리는 '비생산적인 시간'을 두려워하도록 배웠습니다. 잠시라도 멈추거나, 목적 없이 방황하는 것을 죄악시합니다. 하지만 창의성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걷기'가 사실은 가장 '창의적인 뇌 활동'이라는 것.


생각이 막힌 것은 당신의 재능이 고갈되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뇌의 작동 모드를 바꿀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뿐입니다. DMN은 뇌에 쌓인 생각의 먼지를 털어내고, 무질서 속에 숨어있던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게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그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서 불현듯 만납니다. 그것도, 우리가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찾아옵니다.


더 이상 책상 앞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면, 생각이 막혔다면, 일단 걸어야 합니다. 당신의 뇌는 이미 모든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그것들을 연결할 시간을 주면 됩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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