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주의에 지친 당신을 위한 단단한 자존감 수업
밤새워 만든 기획안을 보며 상사가 무심하게 툭 던진 한마디. "그래서, 결과가 뭔데?" 그 순간, 온 마음을 쏟아부었던 수많은 과정의 시간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듯한 허무함을 느꼈던 경험,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내고, 성취하고, 증명하라는 세상의 목소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SNS를 켜면 화려한 성공 스토리가 넘쳐나고, 서점에는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라는 자기계발서가 가득하죠.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결과’라는 이름의 신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합격, 승진, 수상…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없으면 그동안의 노력은 모두 실패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과정이 아무리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다 해도, ‘그래서 성공했어?’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작아지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빛나는 결과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버티는 시간’ 속에 더 단단한 가치가 숨어있다면 어떨까요. 이 글은 바로 그 ‘버티는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화려한 성공담이 아닌,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끝까지 나 자신을 놓지 않았던 모든 이들을 위한 변론이자 응원가입니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트랙 위를 달리는 선수와 같습니다. 이름하여 ‘성취주의’ 트랙. 이 경기의 규칙은 단순합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인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람만이 승자가 됩니다. 1등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 혹은 ‘더 노력해야 할 사람’으로 분류되죠.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자존감은 성과 그래프와 위태롭게 연동됩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자존감 수치가 잠시 올라갔다가, 작은 실수 하나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결과가 곧 나’라는 공식에 스스로를 가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과정을 즐길 여유를 잃어버립니다. 여행의 목적이 오직 정상에 깃발을 꽂는 것이라면, 그곳에 오르기까지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나누었던 대화는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볼까요. 이런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식의 사고방식은 우리를 너무 쉽게 지치게 만듭니다. 성공의 기준은 늘 저 멀리 있기에 우리는 영원히 현재의 나에 만족할 수 없고, 한 번의 실패는 곧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실패처럼 느껴져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하죠. 우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성공이 아니라, 이 끝없는 경주 자체에 지쳐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경기의 규칙을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버틴다’는 말을 종종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하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견디는 시간처럼 말이죠. 하지만 심리학과 철학의 눈으로 이 행위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놀랍도록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숨어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시련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버틴다는 것은 바로 이 회복탄력성이 가장 극적으로 발현되는 순간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 주변의 비난, 불확실한 미래라는 중력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행위,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훈련입니다. 여기에 목표를 향한 끈기, 그릿(Grit)이 더해질 때 버티는 시간은 단순한 인내를 넘어 성장을 향한 투지가 됩니다.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의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말했습니다. 이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버티는 시간 속의 고통과 불안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끌어안고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입니다. 작가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그린 모습처럼 말이죠. 정상에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질 돌을 영원히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 그의 삶은 결과만 보면 완벽한 실패입니다. 하지만 카뮈는 언덕을 내려오는 시지프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저항하며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존엄성은 돌을 정상에 올려놓는 ‘결과’가 아니라, 부조리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을 밀어 올리는 ‘과정’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 말했습니다. 버티는 행위는 어쩌면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가장 치열한 의미 찾기의 과정일지 모릅니다.
머리를 싸매고 몇 날 며칠을 준비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로 끝난 발표를 기억하시나요?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아쉽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던 시험은요? 성취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실패’의 경험입니다. 하지만 잠시 관점을 바꿔봅시다.
결과는 아쉬웠을지언정, 그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 당신은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고 논리를 세우는 법을 익혔습니다. 시험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으며 성실함을 훈련했고, 지식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라는 마침표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과하며 당신 안에 새겨진 무형의 자산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바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해냈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이 자기존중감은 1등을 하거나 상을 받았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외부의 평가나 보상에 의존하는 자존감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투쟁을 이겨냈을 때 얻어지는 단단한 신뢰감이죠. 이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버팀은 이렇게 거창한 사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울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마친 나.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글 앞에서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딱 한 문장이라도 더 써 내려간 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어제의 나보다 딱 한 걸음 더 나아간 이 작은 버팀의 순간들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조금씩 성장시키는 진짜 동력입니다. 아마도 가장 큰 승리는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포기하고 싶었던 어제의 나를 이겨내는 것일 테니까요.
‘버티는 것의 가치를 아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결과에 연연하게 되죠. 괜찮습니다. 수십 년간 우리 몸에 익숙해진 관성을 바꾸는 데는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합니다. 거창한 다짐 대신, 오늘부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몇 가지 작은 훈련을 제안합니다.
1. 하루 1분 ‘버팀 일기’를 써보세요.
잠들기 전, 오늘 하루 내가 대견하게 버텨낸 순간을 딱 한 가지만 기록해보는 겁니다. ‘하기 싫었던 고객 전화를 끝까지 친절하게 받았다’, ‘피곤했지만 계획했던 스트레칭을 마쳤다’ 와 같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이 작은 기록은 결과 중심의 뇌에게 ‘과정에도 의미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가장 효과적인 훈련입니다.
2. ‘과정 칭찬’ 자기 대화법을 연습하세요.
우리는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스스로를 너무 쉽게 다그칩니다. "역시 난 안돼"라는 자동적인 목소리 대신, 의식적으로 다른 말을 건네주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결과는 아쉽지만, 이렇게까지 시도해본 내 용기가 대단해", "이번 도전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해보자" 와 같이, 결과에 대한 평가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인정과 격려의 말을 건네보세요.
3. ‘시간 단위’로 목표를 재설정하세요.
'보고서 완성'처럼 결과 중심의 목표는 과정의 스트레스를 높이고, 예상치 못한 변수에 쉽게 좌절하게 만듭니다. 대신 '오늘 두 시간은 다른 생각 말고 보고서에만 집중하기'처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과 ‘행동’을 목표로 삼아보세요. 목표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그 성취감이 모여 결국엔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하는 법’에 대해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버티는 법’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버티는 시간은 무능력하거나, 비효율적인 시간으로 치부되기까지 했죠.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함께 확인했습니다. 버티는 힘이야말로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회복탄력성의 심장이며, 의미를 찾아 나아가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여정이라는 것을요. 손에 잡히는 결과물은 없더라도, 그 시간을 통과하며 단단해진 우리의 내면은 그 어떤 트로피보다 값진 성취입니다.
이 글을 덮고 당신이 마주할 세상은 여전히 얄팍한 결과로 당신을 판단하려 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압니다. 완벽한 성공보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며 한 걸음 더 내디딘 당신의 ‘버팀’이야말로 진짜 성취라는 것을. 내일 당신이 마주할 또 다른 어려움 앞에서 완벽히 잘해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처럼 끝까지 버텨낸다면,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제, 당신의 가장 위대한 자랑거리는 ‘잘한 일’이 아니라 ‘버텨낸 시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