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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94년 7월 27일
갑오개혁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열한 번째 장면

by 박재한
1894.08.15 김홍집 내각과 갑오 을미개혁 민백-10346_김홍집,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유형.jpg

<김홍집,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 유형>


1894년 7월 27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갑오경장이라고도 부른다. 경장의 뜻은 거문고 줄을 다시 조율한다는 뜻이다. 해이해진 옛 것을 다시 고친다는 의미가 있다.) 내부적인 이유로는 폐정개혁안을 제시하며 조선의 핵심 곡창 지대인 전라도 일대를 점령했던 농민군들의 요구에 응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한편 외부적으로는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일본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자신의 발아래 놓이게 하기 위하여 김홍집을 군국기무처의 수반으로 앉히고 군국기무처 주도로 개혁을 진행했다는 측면도 있다.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6월 25일 경오 7번째 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군국기무처 회의총재에 김홍집을 임명하여 사무를 협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군국기무처 회의총재(軍國機務處會議總裁)는 영의정(領議政) 김홍집(金弘集)이 맡고(당일에 칙유함), 내무 독판(內務督辦) 박정양(朴定陽), 협판(協辦) 민영달(閔泳達),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윤식(金允植), 내무 협판(內務協辦) 김종한(金宗漢), 장위사(壯衛使) 조희연(趙羲淵), 대호군(大護軍) 이윤용(李允用), 외무 협판(外務協辦) 김가진(金嘉鎭), 우포장(右捕將) 안경수(安駉壽), 내무 참의(內務參議) 정경원(鄭敬源)·박준양(朴準陽)·이원긍(李源兢)·김학우(金鶴羽)·권형진(權瀅鎭), 외무 참의(外務參議) 유길준(兪吉濬)·김하영(金夏英),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응익(李應翼), 부호군(副護軍) 서상집(徐相集)을 모두 회의원(會議員)으로 차하(差下)하여 날마다 와서 모여 크고 작은 사무를 협의하여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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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기무처, 퍼블릭 도메인>


갑오개혁이 추진된 근거가 어떠하든, 갑오개혁의 결과물은 실로 엄청났다.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정치기구를 근대적으로 개편하였으며, 조세와 재정을 체계화했다. 또한 과거제도 폐지하여 신분제도를 바탕에 두고 있는 제도들을 폐지하여 근대화를 더 촉진하였다. 또한 소학교를 설치하였고, 한성사범학교라는 교사 육성 학교도 만들어 기초 교육에도 힘을 썼다. 마지막으로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고 사법권을 독립하였으며, 치안과 행정도 분리하는 등의 개혁도 강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태양력을 사용하고 종두법을 시행하여 질병 예방에도 힘썼으며, 단발령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 내용에는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 그리고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이 섞여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많은 개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역시 '정치'가 있었다. 초기 갑오개혁을 진행할 당시에는 일본과 흥선대원군이 힘을 합쳐 김홍집과 갑오개혁을 하였다.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일본과 손을 잡는 정치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일본의 급진적 개혁과는 또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기에 일본과 대원군의 연합은 길게 가지 못하고 중간에 대원군이 물러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일본은 박정양이라는 인물을 조선 정부로 데려와 김홍집, 박정양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개혁을 다시 추진하게 되었다. 이후 개혁이 잘 진행되나 싶었지만 국왕을 필두로 한 조선 왕실의 개혁 거부로 인하여 박정양 또한 물러나게 되었고, 일본에 대해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특히 민비, 오늘날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새로운 대항마로 치켜세우려고 하자 일본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어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다시금 정치적 수세에 몰린 일본은 이 수세를 탈피하고자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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