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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94년 7월 23일
청일전쟁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열 번째 장면

by 박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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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한 장면, 퍼블릭 도메인]


조정은 동학농민군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 이홍장은 일본에게 조선 파병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2,800명을 충청도 아산 지역에 파병했다.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겠다는 의도였다. 1894년 6월 2일 청나라로부터 파병을 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이후 일본은 즉시 병력을 소집하여 9일에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로 진군했다. 대략 8,000명의 일본군이 서울로 파병되었다고 한다. 그 사이 동학농민군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조선 내륙으로 진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화약을 체결하여 동학농민군을 자체해산함과 동시에 그들이 조선으로 진군한 의도를 상실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의 본심을 드러냈다.

1894.07.2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1894년 일본군 경복궁 참탈 사진.jpg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퍼블릭 도메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다. 그로부터 2일 뒤인 7월 25일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기습공격을 하였다.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하필이면 조선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이다.

1894.09.15 청일전쟁 평양전투.jpg.jpeg

[청일전쟁 중 평양전투, 퍼블릭 도메인]


청일전쟁 중 가장 크게 벌어진 전투는 바로 1894년 9월 15일에 이루어진 평양전투이다. 일본군은 약 12,000명의 규모였고, 청나라 군대는 약 15,000명이었다. 수적으로는 청나라가 더 앞섰다. 심지어 청나라 부대는 정예부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략 전술이 더 뛰어났다. 전투의 결과로 청나라 군대는 약 2,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162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후 9월 17일 황해전투를 통해 청나라 해군을 격침시키고 한반도 제해권을 장악했다.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누구인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청나라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시모노세키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배우는 시모노세키 조약이었다. (1)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았다. (참고로 랴오둥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요동이라고 읽는다. 요하강의 동쪽에 있는 반도라고 해서 요동반도라고 불리는 그 지역, 고조선의 세력범위에 들어 있었던 그 지역이다.) 또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는 조선이 정말 무결한 자주국임을 명시하였으며,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청나라가 일본에게 지불하기로 합의하였다. 조선의 자주국을 다시 확인받음으로써 청나라 세력권에서 조선을 완전히 떼어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을 장악할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다.


- 출차 -

(1) 한국학중앙연구원. (25.11.17).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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