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여덟 번째 장면
<1900년 경의 경성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공공누리 1 유형>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은 매우 심해줬다. 대원군은 청나라로 압송되었고, 조선에는 청군 3,000 명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장군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국방부인 병권을 장악하였고, 재정 고문인 진수당은 재정 부분을 장악하였다. 또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이후에는 일본과 앞다투어 조선의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였다.
한편 조선의 개화파 세력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따라 온건적으로 개화를 하자는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모든 것을 서양 것으로 바꾸자는 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다. 급진개화파의 고민은 깊어졌다. 청나라의 입김이 거세져 일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정국을 타파할 변곡점이 필요했다. 그 순간 정국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나라 군대 3,000 명 중 대략 절반의 규모가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파병되기 위해 조선을 떠났다. 청나라 군대가 줄어든 가운데 일본은 급진개화파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일본은 김옥균에게 배상금 40만 원을 탕감하여 지원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공사관 경비병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급진개화파는 이를 종합하여 거사일을 정했고, 거사일은 바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으로 정했다.
<갑신정변(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퍼블릭 도메인>
1884년 12월 4일 축하의 연회가 경운궁에서 시작되자 홍영식을 비롯한 사관생도가 궁을 둘러쌓았다. 시간이 되자 자객이 하수구 쪽으로 출입하여 우정총국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순식간에 왕을 모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정변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민 씨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각료를 교체하고 개혁정책을 발표했다. 그들의 개혁정책으로는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끊고 행정제도와 정치기구를 근대적으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또한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등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서울에 남아있던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급진개화파들을 내쫓았다. 일본은 함포와 경비병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해 놓고서는 실제로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망명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며 잔혹하게 끝이 나게 된다. 우리는 이를 세상을 3일만 가졌다는 뜻에 삼일천하라고 부른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은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를 하되, 한 국가가 파병을 하면 타국에게 이를 즉시 통지해 주기로 조약을 맺었다. 사실상 조선을 두고 마지막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