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여섯 번째 장면
<별기군,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 유형>
근대화에 필요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별기군이라고 하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게 된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구식 군대와는 다르게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부대인만큼 더 많은 혜택과 여건을 주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구식 군대는 차별을 느끼며 불만을 쌓게 되었다. 문제는 구식 군대에게 봉급을 주지 않는 상황이 1년간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1882년 6월 어느 날 정부에서 1년 만에 구식 군인들에게 봉급을 주게 되었다. 그런데 봉급으로 받은 쌀포대 안에 쌀만 있어야 할 것인데, 포대 안에는 쌀과 겨와 모래가 섞여있었다. 1년 만에 준 봉급 치고 이렇게 형편없는 봉급을 받게 된 것이다. 월급 안주는 회사에 더 이상 충성할 수가 있으랴 1882년 7월 23일 구식 군인들은 결국 폭발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임오군란이라고 한다.
<임오군란(일본 공사관 습격 장면),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 유형>
성난 군인들과 개항 이후 물가 폭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하층민들도 군란에 가담했다. 이들은 개화 정책의 주된 세력인 민 씨 일가의 집을 불태우고, 개항의 물꼬를 열었던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 민비는 궁궐 밖으로 도망갔고, 구식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옹립했다.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것이다. 대원군은 개항 이전 정책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았다. 오죽하면 민비가 살아있었음에도 민비가 실종되었다며 민비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개화 정책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음을 공공연하게 알렸다.
하지만 정치적 격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흥 민 씨 세력은 청나라에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며 파병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이 요청에 응했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뒤에 톈진으로 압송한다. 이후 민비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고, 임오군란의 주동자 10명을 처형하며 이 정치적 격변은 끝이 나게 된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각각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공사관이 불탄 것을 복구하고 경비병을 주둔시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치열하여 조선 내에서의 청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기존 일본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청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일본은 이 복잡한 외교셈법을 타파할 방법을 강구하던 중 급진개화파와 손을 잡게 되니 우리는 이를 갑신정변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