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에도 봄이 왔다

by 지현옥


바야흐로 봄이다.

봄바람이 불면 밥상에도 봄이 다. 겨우내 먹었던 묵은지, 묵은 나물 대신 봄향이 담긴 초록 밥상에 몸도 봄과 함께 깨어난다.


헤르만 헤세의 시 <봄>에서 "그가 다시 성큼성큼 흙길을 걸어온다"라는 첫 구절처럼, 봄은 흙이 있는 곳마다 초록 발자국을 내며 온다.


속달동 뜰에도 곳곳에 초록발자국들이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요맘때 올라오는 초록들은 다 귀한 먹거리이다. 아직은 여리고 작지만, 봄은 보약 같은 선물 보따리를 여기저기 풀어놓았다.


화단 돌 틈 사이로 돌나물이 올라오고, 울타리 밑에는 실같이 가는 달래 줄기가 검부지기 사이로 머리를 풀어헤쳤다. 쑥도 양지바른 곳마다 담뿍담뿍 모여있다.


마당과 밭두렁에는 망초가 널려있다. 흙이 있는 곳엔 아무 데나 얼굴을 내밀어 천덕꾸러기인 망초지만, 새봄엔 초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귀하고 반갑다.



마당 구석구석에 고개를 내민 초록들, 잔디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봄의 발자국들을 조금만 따라다녀도 바구니는 찬거리로 넘친다. 매일 마당이 밥상이 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며 성큼성큼 다가온 봄을 그대로 식탁 위에 올린다.


돌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온 통통한 돌나물들을 한 줌 뜯어 초고추장에 살짝 버무리면, 입안 가득 톡 터지는 수분감에 입안은 봄을 만끽한다.



검부지기를 헤치고 찾아낸 가느다란 달래는 그 향이 일품이다. 잘게 다져 간장에 넣고 슥슥 비비면, 갓 지은 하얀 쌀밥이 금세 봄의 향기로 물든다.


양지바른 곳에서 캐낸 어린 쑥은 생콩가루에 살짝 버무려 된장국을 끓이면 요때만 맛볼 수 있는 구수하고 향긋한 봄국이 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한 술 뜨면, 가슴 깊은 곳까지 따스한 봄기운이 번진다.


망초나물은 또 어떤가. 흔하다고 얕잡아 볼 수 없다. 혀끝에 감도는 쌉싸름한 맛이 움츠러든 미각을 되살려주고 집 나간 입맛을 곧바로 되찾아준다.



​오늘도 마당을 기웃거렸다. 어제와 다를 것 없어 보여도, 허리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일 다른 파동이 일렁인다. 며칠 전만 해도 수줍게 고개를 내밀던 민들레가 어느새 손바닥만 한 초록 날개를 펼쳤다. 땅에 바짝 엎드린 녀석을 캐내느라 손톱 밑에 흙이 끼고 거무스름해졌다.


새콤달콤 무쳐낸 민들레 겉절이에 목살을 한 점 구워 밥상을 차렸다. 손끝의 얼룩보다 더 진한 기쁨이 입안 가득 번진다.



내일도 나는 이 작은 기쁨을 찾아 다시 마당을 뒤적일 것이다. 제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계절을 온전히 누리며 그 생명력을 공유하는 의식과도 같다.


한 입 씹을 때마다 흙의 기운이 느껴지고, 또 한 입 씹을 때마다 따사로운 햇살이 몸에 스민다. ​헤세가 말한 그 '초록 발자국'은 마당에서 이제 내 입안을 지나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속달동의 봄은 이렇게 식탁 위로 올라와 비로소 하나의 맛의 정원이 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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