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혼을 쏙 빼놓고 지나갔다. 살구꽃과 앵두꽃까지 연분홍 물결을 이루던 마당에는 잎들이 돋아나며 초록이 짙어지고 있다. 뒤이어 새빨간 명자꽃이 왔고, 진분홍 철쭉까지 가세해 생동감을 더한다. 이렇게 봄은 조금씩 마당의 색채를 바꾸며 하루만큼씩 화사해지고 있다.
얼마 전 살구꽃이 핀 날, 늙은 살구나무 아래 수돗가에서 잔털이 보송보송한 쑥을 씻었다. 성글게 핀 연분홍 꽃잎이 함지박에 담긴 뽀얀 쑥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한 하늘색에 살구꽃 연분홍의 조화는 제주를 사랑한 이왈종 화백의 화폭을 보는 듯 밝고 환했다. 이 고운 빛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렇게 예쁜 날 그리운 사람들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노래를 흥얼거리다 정약용의 죽란시사(竹欄詩社)가 떠올랐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모임 날짜를 정하는데 이보다 낭만적인 방법이 있을까. 나도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竹欄詩社)를 흉내 내고 싶을 만큼 마당이 온통 꽃이다.
꽃을 유난히 사랑한 다산은 집 마당에 살구나무, 매화나무, 치자나무 등을 심고 가꾸며,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스쳐 꽃이 상할까 꽃밭 가장자리에는 대나무 울타리를 쳤다고 한다. 계절마다 오는 꽃과 과일에 맞추어 벗들과 함께 풍류를 즐겼다니 이보다 아름다운 만남이 있을까. 과연 다산만이 할 수 있는 낭만이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련지에 연꽃이 만개하면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또 한 번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모인다. 한 해가 저물 무렵, 분에 매화가 피면 다시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 데에 이바지한다."
나도 다산 같은 정겨운 모임을 만들고 싶어진다. 내가 가꾸는 마당에도 벗들을 불러 제철을 즐기고 싶은 구실은 즐비하다.
살구꽃이 만발하고, 벚꽃 잎이 눈처럼 쏟아질 때 모인다. 오디가 검붉어질 때도 거를 수 없다. 초여름, 옥수수가 익어갈 때 또 한 번 만난다. 무더위를 지나, 구절초가 하늘거리면 보고, 감나무에 대봉이 주홍빛으로 물들 때 다시 마주한다면, 다산도 부럽지 않을 즐거움이 아닐까.
다만, 꽃이 피었다는 이유로 부를 수 있는 친구가 몇인가를 헤아려 본다. 감이 익어간다고 훌쩍 와줄 수 있는 지음(知音)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문득 함석헌 옹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절실하게 와닿는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