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 속에서 흐르는 강
전북 김제의 드넓은 평야에는 논과 길을 구분하는 초록색과 회색만 존재한다.
711번 도로를 타고 죽산면에서 동진강을 건너 부량면으로 넘어간다.
부량면에는 백제 비류왕 때(330년) 축조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벽골제’가 있다. 인부들이 쉬면서 흙을 털고 해어진 짚신을 버려서 이루어진 산이라 하여 신털미산이 눈길을 끈다. 짚신 한 켤레 한 켤레가 이 땅의 풍요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노동의 고단함과 부피로 만들어진 커다란 묘지와 같다.
부량의 들녘은 드넓다.
가끔 해발 20~60m의 언덕 같은 산들이 올망졸망 늘어져 있어 오히려 돋보일 정도다.
지평선이 보이는 벌판에 서 있으면 인간의 눈은 초점을 잃는다.
풍경의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고 있는 모순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소리는 진공이 된 채 아득한 공간을 날아가는 검은 새 떼 역시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그곳에서 도시의 잘게 쪼개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그저 사소해 보이기까지 한다.
강과 바다의 아득한 경계
서김제 IC에서 고군산군도로 들어가는 국도는 만경강을 끼고 달린다. 강 하류에 이르러 서해 앞에 펼쳐진 50여 개의 섬은 말 그대로 섬이 아닌 바다 위에 떠 있는 산과 같다. 이곳에서는 섬과 산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만경강은 바다에 이르러 부푼 허리띠를 풀어버린다.
모든 흐름의 궤적과 함께 장애물을 돌아갔던 지혜의 편린마저 지우고 다시 갓난아기처럼 드넓은 모성의 품 안에 깃든다.
강물에 있어서 종말은 또 다른 생명이자 출발이다.
지평선을 따라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는 삶과 죽음도 모호하고 시작과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을 터전으로 삼는 인간의 삶은 강물처럼 허리가 굽었고 바다처럼 잔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