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했기 때문일 것이다”(알랭 드 보통)
우리의 사랑은 곧잘 사랑을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사랑의 대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생활 속에서 예술을 꿈꾸듯이 사랑도 삶의 단비처럼 환상 속에 존재하다가 내 삶 속에 펼쳐지길 기대하는 것이다.
신데렐라는 마차를 타기 전부터 이미 왕자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라는 말처럼 사랑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꿈꿔온 욕망의 도구일지도 모른다.
내 일상에서 그동안 그려 온 환상이 사랑으로 완성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사랑하고 있는 나’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닐까?
커피숍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 밤늦도록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의 떨림, 그 모든 것이 상대보다는 사랑 그 자체에 더 매료된 건 아닐까?
우리는 사랑이라는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을 연출하고 싶어 한다. 나 자신보다는 상대에게 비치는 나 자신이 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잔인하다. 상대방이 내가 꿈꿔온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당황한다.
현실의 사랑이 내 환상이 만들어 놓은 틀에 맞지 않으면 어딘가 결함이 있다고 여긴다.
결국,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현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실체가 아니라 그가 내 삶에서 완성해 줄 이미지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식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환상이 깨졌다는 뜻이다.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황금빛 사랑은 어느새 평범한 일상의 호박으로 돌아와 있다.
사랑의 끝이 꼭 비극만은 아니다.
어쩌면 진짜 사랑은 이 환상이 깨진 이후에야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투박하고 어설프지만, 진실한 인간으로서의 사랑. 완벽하게 연출된 무대가 아니라 실수투성이인 리허설 같은 사랑.
그제야 우리는 바로 이 사람이기에 사랑의 의미가 있다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상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때로는 예술가처럼, 때로는 관객처럼, 그리고 가끔은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