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에서 찾은 부조리한
행복

by 채움과 비움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새움)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을 연기하지 않는다.

뜨거운 햇살 아래 해변에서 그는 아랍인을 쏜다. “태양 때문이었다.”라는 그의 진술은 법정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살인자가 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재판정은 그의 삶을 해부하고, 사람들은 그를 규정하려 애쓴다. 사형을 선고받은 순간,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던 이 남자는 처음으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카뮈는 이 소설에서 묻는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뫼르소’는 햇살, 바다처럼 느낄 수 있는 것들에서만 삶의 의미를 느꼈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우는 것, 애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 승진을 원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한 연극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연극을 요구한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괴물이 된다. 재판은 살인 사건이 아니라 그의 ‘비정상성’을 심판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사형 집행을 앞둔 ‘뫼르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행복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앞둔 남자가 행복을 느낀다니 이보다 더 큰 부조리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카뮈가 말하고 싶은 대목이 아닐까?


‘뫼르소’는 타인이 만들어 놓은 삶의 목적 속에서—살인자로서, 사형수로서— 세상의 관심을 받았고,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이‘존재한다’라는 것을 느꼈다. 그가 느낀 행복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다.


이방인의 고뇌


우리는 모두 아무런 목적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삶의 의미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사회가 규정해 둔 삶의 목적과 의미를 이식받는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결혼, 성공. 이것들이 마치 삶의 본질적인 목적인 양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 바라보고,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으로 행복을 측정한다.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기준을 충족하면 안도한다.


‘뫼르소’는 자신의 감각과 순간에 충실하게 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상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살인자가 되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서야 그는 존재의 무게를 느꼈다.


나는 이것이 부조리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 때는 투명인간이었지만 타인의 규정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


지금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온전히 나의 것인가?

내가 느끼는 성취감은 내 안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준 환상인가?


만약 내 삶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 미리 정해놓은 방향이라면 나는 ‘뫼르소’처럼 타인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방인이 아닐까.

카뮈는 우리에게 용기를 요구한다.

사회가 제공하는 안전한 의미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타인이 만들어 놓은 무대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무대 위에 설 때 우리는 이방인이 아닌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뫼르소’의 부조리한 행복은 경고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찾은 행복은 죽음 앞에서야 깨닫는 허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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