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는 나쁘지 않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걸었다. 목적지가 카페였다. 그 사실이 좋았다. 급한 곳이 아니라, 가고 싶은 곳으로 걷는 것.
빗소리가 우산 위로 쏟아졌다. 얇은 천 하나 차이인데 그 안이 다른 공간 같았다.
소리는 들리는데 닿지 않는다는 것
우산이 그런 물건이다. 세상과 나 사이에 얇은 막을 하나 대주는 것. 그날은 그게 꼭 필요했다
카페 문을 열자 냄새가 먼저 왔다. 커피와 빵과 비가 섞인 냄새. 정확히 어느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냥 이 공간의 냄새. 몸이 먼저 알아챘다.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됐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이미 오전에 커피를 마신 날이었다. 카페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커피의 형태가 필요한 것이었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는 것, 그 온도. 그게 오늘의 목적이었다.
마시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다를 때가 있다. 오늘은 느끼러 온 것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빗속을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산 색이 다 달랐다. 검은 것, 투명한 것, 꽃무늬인 것. 저마다의 우산을 들고 같은 비를 맞으며 지나갔다. 잠깐 그것을 보다가 책을 꺼냈다.
책을 펼쳤다. 읽혔다. 빗소리가 배경으로 깔려 있으면 문장이 잘 들어오는 것이 있다. 이유를 설명하려면 복잡해지는데,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페이지가 넘어갔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노래가 들어왔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항상 귀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그냥 배경이다.
그런데 어떤 곡은 불쑥 들어오는 때가 있다. 무슨 곡인지 몰랐다. 제목도 가수도. 다만 멜로디가
이상하게 지금 이 빗소리와 이 온도와 이 오후와 어울렸다. 억지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책을 덮었다. 잠깐이지만 덮었다. 잔을 들고 소리를 들었다. 빗소리와 음악이 섞였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 모르게. 그냥 그 안에 있었다.
좋은 것들이 한꺼번에 올 때가 있다. 빗소리, 냄새, 온도, 멜로디
따로따로는 별것 아닌데 같이 오면 달라진다.
노래가 끝났다. 다음 곡이 시작됐다. 책을 다시 폈다. 빗소리는 여전했다. 잔은 조금 식어 있었다.
식은 디카페인을 마셨다. 온도가 내려가면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달라진 맛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처음의 온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커피도 그렇고, 어쩌면 다른 것들도.
창밖의 비가 조금 약해져 있었다. 우산을 쓰고 걸어온 골목이 보였다.
아까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길.
저 길이 없었으면 지금 여기 없었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그 당연한 것이 오늘은 조금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오는 데 꽤 걸렸다. 이 창가 자리까지.
현재의 나는 나쁘지 않다.
이 말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공무원 시험을 보던 시절에도, 사업이 기울어가던 시절에도, 재판에서 지던 날에도, 지게차 위에서 욕을 먹던 날에도, 150만 원짜리 차의 진동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리던 새벽에도
지금 이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비 오는 카페에 앉아서, 식어가는 디카페인을 마시며, 이름 모를 노래를 들으면서
나쁘지 않다는 말이 나왔다. 억지로 꺼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껴져서.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은.
나쁘지 않다는 말이, 어떤 날에는 꽤 많은 것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