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否定)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했을 때 내놓는 가장 비겁하고도 간절한 방어기제다. 당신의 문장이 무너지고, 당신의 세계가 뒤틀리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잠시 몸이 안 좋아서 그럴 거야', '아이를 키우느라 너무 지쳐서 일시적인 증상일 거야'. 그렇게 **"설마"**라는 단어 뒤에 숨어 현실을 외면하던 나의 비겁함은 어느 날 오후, 차가운 쇳덩이 앞에서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날씨가 좋아 딸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당신은 유모차를 챙기며 평소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부터 당신은 복도의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옷깃을 붙잡았다.
"여보, 조용히 해봐. 지금 복도 끝에 누가 서 있어. 아까부터 계속 우리 집 문 앞을 서성거렸어."
내가 아무리 복도를 확인해도 그곳엔 정적만이 감돌았지만, 당신의 공포는 실재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당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닫히는 문틈 사이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숨을 죽였다. 밖으로 나가서도 당신의 고개는 쉴 새 없이 뒤를 향했다.
"저기 봐, 검은 옷 입은 남자. 아까부터 우리 계속 따라오고 있어. 당신은 왜 눈치를 못 채? 지금 우리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잖아! 쟤가 우리 애를 노리고 있단 말이야!"
당신이 가리킨 곳에는 그저 평범한 이웃이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는 우리 가족의 목숨을 노리는 미행자였다. 당신은 미친 듯이 유모차를 밀며 골목을 휘저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덜컹거리는 유모차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당신은 그 울음조차 '적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신호'라며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다.
잠시 당신이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유모차 시트 아래를 뒤졌다. 당신이 출발 전부터 유독 그곳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비장하게 숨겼던 모습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손끝에 닿은 것은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었다. 천을 들춰내자 그곳엔 신문지에 돌돌 말린 주방용 식칼이 놓여 있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딸아이가 누워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워야 할 유모차 안에 이 살벌한 물건이 왜 들어있어야 하는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았다. 돌아온 당신에게 칼을 들이밀며 이게 왜 여기 있느냐고 소리쳤을 때, 당신은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절규하듯 속삭였다.
"당신은 너무 안일해! 저 남자가 우리 애를 해치려고 미행하고 있는데, 맨손으로 나갈 순 없잖아. 이건 우리를 지키려는 거야. 내가 안 하면 누가 우리 아이를 지켜? 당신도 저 사람들이랑 한패라서 가만히 있는 거잖아!"
당신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는 투사의 그것처럼 결연했다. 당신에게 그 칼은 흉기가 아니라, 당신 뒤를 밟는다고 믿는 '그림자'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성물(聖物)이었다. 아내의 모성은 병마와 결합하여 가장 위험한 형태로 변질되어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당신의 손에 들린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찢겨나간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당신이 잠든 방 쪽을 바라보며 나는 수천 번 "설마"를 되뇌었다. 하지만 그 '설마'라는 단어는 이제 나를 위로하는 방패가 아니라, 내 심장을 찌르는 창이 되어 돌아왔다.
어쩌면 내 안의 비겁한 '부정'이 병을 키운 것은 아니었을까. 하수구 냄새에 집착할 때, 아랫집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그때 내가 "지독한 우울증일 거야, 쉬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억지로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내의 이상행동을 '육아 스트레스'라는 흔한 이름표 뒤로 숨기려 했던 나의 간절한 바람이, 사실은 아내를 더 깊은 망상의 늪으로 떠밀어 버린 방조는 아니었을까.
나의 부정이 독이 되어 아내의 영혼을 잠식하는 동안, 나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연기하는 데 급급했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내에게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드는 잔인한 방치가 되었음을, 유모차 밑의 차가운 식칼을 만지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지켰던 그 침묵이,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을 이토록 위험한 벼랑 끝으로 몰고 온 것 같아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랑하기에 지켜야 할 아내와, 동시에 아내가 두려워지기 시작한 지독한 모순의 밤. 뜬눈으로 지새운 그 밤의 끝에서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가 알던 평탄한 세상은 이미 끝났으며, 나의 비겁한 회피가 만들어낸 이 거대한 구멍 속으로 우리 가족이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