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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Sep 30. 2015

겨울날의 일기

Un jounal d'hiver



하루::


꾀병    _박준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 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 오랜만에 한국어 시집을 꺼내 읽었다. 아주 천천히. 여기 올 때 좋아하는 책을 다 가져올 수 없어서 다섯 권의 시집을 골라 왔다. 그 중 허수경 시인의 책이 세 권이다. 이 책들은 낡고 닳도록 읽는다. 가끔은 노트에 옮겨 적어둔 시를 찾아 읽는다. 어느 날에 마음의 한 귀퉁이를 접어놓게 만든 세모의 흔적이, 그 시절 그 서정을 불러 온다. 오늘 나를 멀리 데려간다.


뉴스를 보니, 리옹 가는 길 작은 기차역에서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사십 분 가량 연착되었다. 어디선가는 또 눈이 죽었다. 입과 코를 잃어버린 눈사람만 온전치 못한 형체로 햇빛을 버텼다. 쓰러지진 않았으나, 생이 단 하루만 연기될 뿐이었다. 사라질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어제 본 영화를 다시 보았다. 밀린 숙제는 내팽개쳐 두고. 핀란드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서 손으로 글 쓰는 걸 배우지 않는다고 한다. 키보드가 연필과 공책을 대신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딨냐는 교육학자의 견해를 인터넷 뉴스로 읽었다. 손으로 쓰는 글씨를 배우지 않는 세대는 어떤 생각의 속도를 지니게 될까. 저녁으로 어제 만들어 놓고 먹지 않은 카레를 데워서 먹었고, 커피를 한 사발 마셨다. 냉장고 안에 사다 넣어둔 양배추는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다. 손질하기 시작해야 할 텐데 너무 크다.


요즘엔 항상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들어온다. 캄캄해진 밤거리를 혼자 걷는 건 자신 없는 일이다.









이틀::


≪ Ceci est ta vie. Ceci est a toi. Tu peux faire l’exact inventaire de ta maigre fortune, le bilan precis de ton premier quart de siecle. Tu as vingt-cinq ans et vingt-neuf dents, trois chemises et huit chaussettes, quelques livres que tu ne lis plus, quelques disques que tu n’ecoutes plus. Tu n’as pas envie de te souvenir d’autre chose, ni de ta famille, ni de tes etudes, ni de tes amours, ni de tes amis, ni de tes vacances, ni de tes projets. Tu es assis et tu ne veux qu’attendre, attendre seulement jusqu’a ce qu’il n’y ait plus rien a attendre : que vienne la nuit, que sonnent les heures, que les jours s’en aillent, que les souvenirs s’estompent. ≫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를 읽었다. 엊그제 도서관에서 빌렸다. 짧은 문장의 호흡에 빠져들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작은 글씨를 읽기가 피곤해질 때쯤, 베르나르 께이잔느가 만든 흑백 영화를 먼저 보았다. 1974년에 개봉했다. 파리의 거리, 텅 비어 있고, 군중들, 무너진 벽과 아무도 지나지 않는 센강을 몽타주해서 보여준다. 흑백 영화의 매력이 돋보였던 것은, 느린 카메라 무빙워크와 비어 있는 공간들이 자주 비추는 때문이다. 주인공 '그'의 시선과 방안의 사물들, 천천히 흐르는 움직임과 일상 속에 익숙한 제스처의 반복들.. 이를 테면, '그'는 자명종을 끄고 일어나 포트에 물을 끓이고 사발에 커피를 마신다. 혼자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눈을 감는다. 거울을 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재빨리 이어지는 짧은 문장들, '너'에게 하는 '나'의 말들.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처럼 말들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생각은 그 말들을 순조롭게 따라가지 못하고, 회귀와 정지를 반복한다. 말과 말 사이의 '휴지'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가시적으로는 침묵이지만 사고의 휴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괄호가 생길 때, 연상작용으로 인해 떠오르는 말들은 무질서하게 그 빈틈을 노린다.

 






사흘::



지난 열흘 내내 흐림, 눈, 비, 다시 흐림의 반복이더니, 오늘 오전 열 시쯤 아주 오랜만에 해가 나왔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테라스에 앉아 있다. 샌드위치나 감자튀김 같은 간단한 점심을 먹는 모습이 보인다. 뺨에 닿는 바람은 차가워도 등을 어루만지는 햇빛은 따뜻하니까 테라스 자리에 앉기 좋다. 햇빛 아래선 사람들이 더 수다스러워진다. 멀리서 저들의 표정만 보고도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길가의 가게에 들어가 초콜릿 한 통을 샀다. 그리고 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백오십 그람을 다 먹어 치웠다. 무엇이 그리웠는지도 몰랐다. 어디가 아팠는지도 모른다. 불시에 이렇게 단 것을 삼켜야 할 때가 있다. 눈가를 비비며 마지막 초콜릿 한 조각까지 입 안에 넣었 삼켰다. 불쑥 찾아온 기억도 같이 삼켰다. 헌책방의 손이 잘 닿지 않는 책장 윗 칸에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책들 중 하나를 손에 집었다가, 먼지만 와륵 떨어지고, 내가 찾던 책이 아니라 금세 내려놓을 때처럼, 죄책감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겨울은 하루만큼 더 지나갔다. 햇빛이 유난히 눈부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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