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 fin de mon premier semestre
기숙사 창밖으로 보이는 마당의 나무는 이미 나뭇잎을 다 떨군 지 오래다. 구월에 다시 그르노블에 도착하여, 눈부신 가을빛 아래 뒹굴던 때도 다 지나고. 어느덧 십이월, 마지막 열두세 날을 남겨두고 있다. 낮 기온 14도, 일일 최저 기온 영상 5도. 십이월 겨울이라기엔, 이상기온이 틀림없다.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봄이라 여겨질 만큼.
문학과에 등록을 했지만 사회학과 수업을 더 많이 수강했다. 9월 16일 첫 수업을 듣고, 오늘 종강을 했다.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수업을 들었다기보다는 결석하지 않고 학교를 다니는 데에 의미가 있었지도 모른다. 온통 불어로 진행되는 교수님의 설명 중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다. 수업 주제와 맥락을 놓치기 일쑤였고, 노트 필기를 한다고 해도 문장을 쓴 적이 거의 없었다. 파편적인 단어들의 나열이 되어, 노트를 봐도 복습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문과대여서 그런지, 수강생 중 아시아인은 나뿐이었다. 매 수업 시간마다 나 홀로 듣기 평가와 받아쓰기를 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수업은, 금요일 오후 4-5 시간씩 들었던, '문학의 사회학La sociologie de la littérature '이었다. 첫 수업 시간에 교수님은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지향하는 공부는 '자기 자신의 프리즘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창문 유리창을 가리키며, 유리창을 통과하는 빛과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은 그 굴절이 다르다고 말하면서 칠판에 간단한 선을 그렸다. 하나의 굴절과 일곱 개의 굴절, 어떤 외부 자극이나 현상이 우리의 시각을 통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고 덧붙였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수없이 많은 빛의 굴절을 만드는 것, 굴절이 많을수록 값어치가 높다는 것을 지적했다. 나는 교수님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칠판에 그려진 삼각형을 보고 나서, 빛이 통과할 때,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마음에 품었다. 그 지혜의 다이아몬드 하나처럼, 정교하고 섬세하게 생각이 깎이기를, 그래서 빛이 잘 통과되는 부드러운 각과 면을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랐다. 앞으로의 공부는 그런 과정이 될 것이다.
고데즈 교수님은 5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인다. 처음 학과 설명회 때 빨간색으로 염색한 곱슬 단발머리가 눈에 띄었다. 며칠 후, 교수님은 턱수염을 파랗게 물들이고 오셨다. 그는 가끔 자신이 소르본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을 때 생 제르망 거리를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수업 시간에 무언가를 설명할 때는 자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야가 멀리 어딘가를 향할 때마다, 깊은 곳을 뒤적여 생각을 꺼내는 듯했다. 현상에 대해, 작품에 대해 사회학적 관점들 밝혔고, 결코 서두르지 않았으며, 수업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나를 배려해서 천천히 몇 번씩 반복해 말하기도 했다.
문화 예술 석사 과정의 수업을 듣는 동안 내가 이방인으로서 겪는 언어의 어려움에 대해 관심과 이해를 보여 준 첫 번째 사람은 고데즈 교수님이었다.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다수 동료들은 언제나 너무 빠른 속도로 말했다. 언어의 문제와 동반하여 문화, 인종, 국적,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거리감은 차츰 소외감으로 변했다. 내가 너무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녀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지 내 나이를 탓하기도 했다. 문화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진 태도가 폐쇄적인 것 같다고 판단을 내리고 그들에게 실망한 적도 있다.
지난 주 '문학의 사회학'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종일토록 열두 명 학생의 발표가 이어졌다. 첫 번째 학생이 자신이 분석한 책을 발표하면서 준비해 온 글을 무척 빠른 속도로 읽었다. 그 친구가 발표를 마치자 교수님은 발표를 왜 하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이것은 너희 각 사람이 연구한 것을 전하고, 교환하고, 생각을 확장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송신자는 수신자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수신자가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의 발음, 속도, 억양, 상대의 눈빛, 표정, 태도를 살펴야 한다." 그 말 끝에, 불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말을 듣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도 고려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석사 연구과정이라 하면, 공부하는 기간 동안 자신의 연구주제를 알차게 탐색해 가면 된다. 논문 주제와 연구 방법은 지도교수님과 상의를 하고, 혼자서 도서관에서 자료를 구하고,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일을 되풀이하면 된다. 그것은 분명 책을 마주하고, 생각을 훈련하며, 자기가 깊어지는 시간일 것이다. 공부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에 비추어 보면, 나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했다. 어쩌면 늦은 나이에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학위가 목적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서 공부를 통해, 혹은 이 시간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데에 마음을 쏟고 싶었다. 모름지기 내가 공부하는 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람에게 향하는것이기를 바랐다. 비록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수신'에 그치고 말지라도, 지금으로서는, 내 공부가 이타적으로 쓸모 있기를 바라고 싶었다.
오늘 이 마지막 수업의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나는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천구백칠십칠 년 엮어진 것이었다. 속 종이는 누렇게 바래졌고, 표지 겉장까지 분리된 채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었다. 표지가 떨어진, 그 은밀한 속을 들여다보니, 아주 튼튼해 보이는 실로 묶여 있다. 나의 생보다 긴 시간을 버텨 온 한 가닥의 굵은 실. 나는 해야 할 발표 준비는 안 하고 책의 수명과 실의 상태 같은 엉뚱한 생각이나 하며 책상 앞에 앉아 십이월의 첫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 학기를 마치며 백일 가까운 시간동안 나는 공부를 하게 된 오늘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자주 질문했다. 오늘 공부를 하게 된 의미라고 말을 조금 바꾸어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이든, 생각이든, 마음가짐이든, 겉은 비록 낡고 닳아도 그 중심이 단단히 묶여 있다면, 완전히 다 흐트러지지는 않을 거라고 바라고 믿으며, 한 권의 책처럼 쓰이는 삶의 낱장들... 매일 그걸 하나씩 넘기고 있다. 나의 첫 학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