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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Sep 23. 2015

가을 빛, 뤼미에르

La lumère d'automne


구월은 새롭다. 여름 내내 바캉스로 텅 비어있던 마을은 돌아온 사람들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오후 네 시는 그런 활기를 느끼기에 충분히 좋은 때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렇게 장 주레 거리부터 빅토르 위고 공원을 지나 노트르담까지 걸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공원에, 골목길에, 카페 테라스에도 곳곳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라파예트 백화점에 근처에 늘어선 작은 상점들은 저마다 새 학기 새 출발을 겨냥하여 쇼윈도에 새 옷, 새 구두, 새 가방을 진열해 두고 가을에 어울리는 색들로 한껏 꾸몄다.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는 느낌은 가을햇살과 함께 온다. 혹독한 여름의 빛이 지나간 자리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이 대신 내려와 앉았다. 한껏 들뜬 거리 분위기와 더불어 빛나는 오후 햇살은 어제 몰랐던 것처럼 새롭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생의 기운을 채우게 한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가로수 그림자들까지 거리를 흔들어 놓으면, 미동하는 감각들 속에서 어느새 걸음이 가벼워진다.





허나 한 계절을 보낸 해는 조금씩 제 힘을 뺄 줄 안다. 그동안 제 몫을 다 했다는듯 물러서는 빛, 가을빛은 너무 연약하고 또 쉽게 사라진다. 사흘 뒤면 추분인데,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작년 가을엔 추분을 기점으로 날씨가 바뀌었다. 무서운 속도로 밤의 시간은 길어졌고 비가 자주 내렸으며 흐린 날들이 일주일에 사나흘은 되었다. 이 기억으로 나의 어깨는 조금 움츠러든다. 지속되는 저기압 날씨 탓에 두통약을 달고 살았던 긴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음 해 춘분 때까지, 아주 긴 날들을...



빅토르 위고 공원, 키 큰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얼마 간의 시간을 보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벤치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청소년 정도로 보이는 무리는 양지바른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옷을 잘 차려입은 어떤 노인은 이따금 고개를 들어 정류장 쪽을 바라봤다. 젊은 여자들이 데리고 나온 아이들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공원의 어떤이들은 긴 겨울을 위해 미리 햇빛을 몸 안에 꾹꾹 눌러 담아 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오지 않을, 아름다운 빛의 시간을 기억해 두는 일이다.



머리 위 마로니에를 올려다보면, 조금씩 타들어가기 시작한 나뭇잎 가장자리가 먼저 눈에 띈다. 그 위로 빛이 투명하게 쏟아졌다, 소멸의 흔적들을 축복하듯. 스스로를 비워가는 빛과 그것을 채우려는 사람 사이에서 이 마로니에 나뭇잎은 은밀히 제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다시 걷다가 중심가 사잇길로 들어설 때였다. 생 앙드레 광장 쪽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둥둥, 두둥 둥둥,... 축제의 소리였다. 골목을 돌아 광장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큰 원을 그리며 모여 서 있었다. 눈길만 슬쩍 던지고 가는 행인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흥겨운 분위기였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 같이 한 곳을 바라보는 풍경이 묘하게 신비로웠으나 나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새로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그르노블로 돌아온 지는 보름이 지났다. 다시, 처음 왔을 때처럼 걸어다니며 길을 익히고 있는 이유는,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일 년 반 전, 홀로서기를 작정하고 낯선 도시에 발을 디뎠던 때, 불어를 익히면서 실수하고, 실패하고, 수없이 연습하던 때, 처음 이방의 친구를 사귀고, 몇 마디 안 되는 언어로 마음을 주고 받을 때.. 그때의 마음들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기쁘고 설레면서, 한편 두렵고 염려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건 지금도 똑같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와 목적을 질문하고, 끝까지 잘 버티고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잘 하고싶은 마음이 들수록, 그러지 못할까봐 걱정도 커진다. 그르노블 2대학의 석사 과정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도, 지난 주에 등록을 하러 찾아갔던 날도, 엊그제 첫수업을 듣고 강의실을 나오던 날도 기쁨보다 두려움이 조금 더 앞서 있었다. 걱정했던 일은 단 한 가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눈앞에 현실이 된 일들을 하나씩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나는 의심해야 안심하는 사람인 걸까.





내려 놓는다는 것... 제 몫을 다 하고 난 뒤, 욕심 없이, 홀로 낮아지는...



그러다 오늘에야 비로소 가을, 빛을 보았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분주한 구월에, 스스로 조용히 힘을 내려놓는 빛을. 둥글게 산란하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온유하게 쓰다듬는 저 빛을.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감싸 안고, 부서지는 나뭇잎을 위로하다가도, 제 몫을 다 하면 욕심 없이 자리를 물러설 줄 아는 그 빛, 구석진 자리로 내려가서 홀로 빛날 줄 아는 빛을... 그리하여 나는 이제부터 걸어야 할 공부의 길을 조금 다르게 시작해 보려고 한다. 곧 다가올 긴 겨울, 스스로 깊어지는 시간을 준비하며, 오늘 이 순간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을빛 같은 시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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