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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Nov 16. 2019

사월의 눈길

la neige en avril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창문을 보니 밖은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앞 건물 지붕이 하얗게 변한 것이 보인다. 어제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결국 눈으로 바뀌었나 보다.


오전에 가게 일을 하는 날은 8시 45분쯤 집에서 나온다. 여느 때처럼 트람역으로 바로 가지 않고, 꺄잔느 드 본 Caserne de Bonne 상가 쪽으로 걸었다. 처음 이 동네를 오게 된 이유는, 멜리에스 Meliès영화관 때문이었다. 광화문이나 신촌에 다니던 독립영화관과 분위기가 닮아 있는 곳이다. 처음 봤던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이곳에서 처음 맛본 커피 맛은 기억한다. 영화관 안에 자리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의 이름과 꼭 같은 영화관 안 카페에서. 눈처럼 연약한 사람들이 말 없이도 얼마나 따뜻할 수 있는지 그 영화가 내게 허락했던 조금 특별했던 마음을 생각하면서, 그 후 몇 번 발걸음을 여기에 두었다. 이 공간이 주는 생각과 감정들이 내안에 차츰 쌓이다가, 이 동네로 이사를 오게끔 나를 부추겼을 것이다. 이사 온 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동네는 내게 가장 좋은 동네다. 좋은 사람들과 거닐었던 시간들도 겹겹이 쌓여 있는.


5년 전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동네의 상점들, 음식점들은 서브웨이 샌드위치도 그 옆의 일갑자기 나타나고 금세 사라지는 일이 거의 없다. 식당과 이탈리아 피자집도 모두 그대로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점들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위안을 준다. 간판들도 수수한 편이다. 그저 제 이름을 써 놓았는데, 꽃집 Fleurs, 정육점 Boucherie, 미용실 Coiffure이라고, 보통명사만 써 놓은 상점들도 눈에 띈다. 그 자리에 존재한 만큼의 시간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하여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동네를 거닐 때면 가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시인과 촌장의 노랫말을 읊조리게 된다.  


일 년에 한 번 한국에 들어가 보면 우선 뭔가가 너무 많은 것에 놀라고, 너무 많이 바뀐 것에 놀랐다. 전철역에 내려서 우리 집까지 걸어가는 일 킬로미터도 안 되는 길을 걸을 때면 '이것도 바뀌었구나, 이것도 새로 생겼구나... ' 하면서 양옆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인도를 침범하고 있는 입간판들이 눈에 거슬린 적도 있다. 존재를 과하게 드러내기 위해 세워진 간판들. 크고 요란스럽게 자신의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와 그 속에서 옆집도 앞집도 서로 따라 하게 되는 사정을 생각했다. 각자가 자기를 소신있게 지키지 못할 때, 거리의 풍경은 얼마나 헝클어지는지를. 


레스토랑의 입구 옆에는 '오늘의 메뉴Plat du jour'가 손글씨로 적혀 있다. 날마다 점심 메뉴가 새로이 바뀌었다. 그 손글씨, 과연 선의 예술이라 할 만큼 굴곡 많은 필기체가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리 이름들이 익숙해진 덕분에 지금은 글씨체도 알아보기 편해졌다. '오늘 여기 쉐프는 대구 요리를 하는군' 하고 그날그날의 식욕과 호기심에 따라 눈에 띄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가게 앞에 메뉴판을 하나 놓아둔다. 가까이 다가가야 그 메뉴판을 넘겨볼 수 있는데, 겉치레 없이 레스토랑 본연의 의미대로 손님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요리하는지, 손님이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출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카페에 들어갔다. 에스프레소를 달라고 말하고 앉아 있는 사이에도 '잘 지내셨어요?'라고 주고받는 말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주인과 손님이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내게는 집 앞 빵집, 집 근처 카페가 친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지나가다 보고 호기심에 들어간 레스토랑의 점심이 만족스러웠다면, 늦은 저녁 손님도 없는데 늦게까지 문을 연 레스토랑의 주인과 몇 마디를 나누게 되었다면 그곳이 나의 맛집이 된다. 여기 살면서 검색을 해서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남들이 다 가는 곳을 굳이 검색해서 찾아다니지 않고, 정보를 많이 알고 있지 않아도, 그날그날이 순간의 선택들로 채워지고, 선택은 취향이 된다. 타인의 추천보다 나의 직감을 믿게 된다. 눈길이, 발길이 닿은 대로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여유가 생긴다.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고 나와 트람역으로 걸었다. 눈길 위를 걸었더니, 운동화는 금세 젖어 버렸다. 이런 날 여분의 양말을 챙기는 것을 늘 잊어버렸다.


봄눈. 사월의 눈이라니.


오늘은 눈으로 덮인 채 고요한 이 공원에서는 사실 햇볕 좋은 날 오후의 샌드위치를 먹으면 좋다. 폴 빵집과 서브웨이가 가까이 있어서 점심시간이 되면 공원이 사람들로 붐빈다. 혼자 나와 책을 읽거나 먼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 서넛이 둘러앉아 먹을거리를 나누는 사람들.. 각자 나름대로 이곳에서 다른 날과 다름없이 평범하지만 새롭게 주어진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다. 이 날들은 어떻게 기억될까, 먼 훗날. 이 날들을 다 기억할 수는 있을까. 


수백 번은 더 지나다닌 길인데도, 아침 풍경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미 파릇하게 돋아난 풀들에 내려앉은 눈을 살폈다. 목련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도 눈이 조금 쌓였다. 하얗게 빛나는, 그러나 이내 사라질 눈 때문인지, 그 아래 숨죽인 채 무겁고 차가운 눈을 버티고 있는 식물 때문인지, 이 희고도 푸릇한 풍경 앞에서 조용한 생명력을 느꼈다. 생명력이란, 견디는 힘인 줄도 모른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것, 지나가고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힘. '너도 버티고 있구나...' 하며 길을 지나갔다. 


정오가 되자, 일하고 있는 가게 안에 햇볕이 들어왔다. 길 위의 눈들은 흔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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