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us pensons toujours ailleurs
nous pensons toujours ailleurs
뜨거운 팥죽이 먹고 싶었다. 지난 동짓날에도 한 술 그립지 않던 것이, 왜 불쑥 생각나 허기지게 하는지. 지난 주에 친구가 마침 파리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팥죽이 먹고 싶노라고, 즉석식품이라도 좋으니, 파리에 있는 한국식품 마트에서 그것을 두어 개 사다 주기를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바쁜 여정 중에도 잊지 않고, 캔에 든 팥죽 두 개를 사서 내려왔다. 그르노블에 도착하던 날 저녁에 곧장, 내게 믹스 커피 봉지 열 개와 함께 건네 주었다. 나는 마치 집앞 가게에 다녀오듯, 그것들이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집에 왔다.
기숙사 방에 들어오자마자, 팥죽 하나를 뚝딱 먹어 치웠다. 사실, 색만 팥죽색이었지, 상상했던 그 맛은 아니었다. 기대는 무참히 깨져 버렸다. 팥죽이 심하게 달기도 했거니와 담겨 있던 캔의 금속 맛이 심하게 베어 있던 탓이다. 첫술에 이미 그 비릿한 맛을 알아차렸지만, 불평할 새도 없이 한 캔을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입안에 남아 있는 금속 맛을 없애기 위해, 인스턴트 믹스 커피 봉지 하나를 뜯어 뜨거운 물을 부어 마셨다. 사실 이 동네 아시안마트에서는 믹스 커피를 구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익숙한 달콤함은, 언제든 마실 수 있는, 지금 막 뽑아낸 에스프레소보다 귀한 맛이다.
엊그제는 수건을 사러 갔다. 완전히 하얀 수건을 사고 싶었지만, 망설임 끝에 미색과 회색을 하나씩 골랐다. 기숙사에 있는 동안은 흰 수건을 푹푹 삶아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건을 두 장 사려면, 다른 걸 사는 건 포기해야 한다. 수입은 정해져 있다. 그에 맞춰 소비도 정해져야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한다. 비단 물건의 소유 문제만이 아니다. 타향살이는 사실 (자주) 불편함과 불만족을 동반한다. 점점 나는 가질 수 없는 것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삶의 방식을 배우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한 생각이 찾아 올 때 있다. 갖지 못한 것들이 몹쓸 아쉬움으로 남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이 몹쓸 허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안다. 갈 수 없기 때문에 가고 싶은 것처럼,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이다. 닿을 수 없기 때문에 닿고 싶고,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찾고 싶은 것... 역시 그러하다. 마음속에 그리움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무얼 해도 그것을 완전히 뽑아낼 수는 없다. 뿌리가 안으로 안으로 가만 자라고 있기 때문에... 부재의 증명처럼, 시간은, 무섭게 그 뿌리를 키운다.
« nous pensons toujours ailleurs »
몽테뉴가 말했다. '우리는 늘 다른 곳을 생각한다' 이 말에는 물리적 이동뿐만 아니라, 정신적 여정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희미한 땅에서 지적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이 여정은 사고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이를테면, 움직이고, 차이를 만들고,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도착한 자리마다 기존의 생각의 경계를 넘어서고 다시 새롭게 이방인이 되는 태도이다. 그르노블로 떠나오기 전에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내게 노란 봉투를 하나 주었다. 그 속에 한 줄의 문장이 쓰여 있는 엽서가 들어 있었다.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그 친구는 떠나는 나에게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고 엽서에 썼다.
팥죽을 다 먹고 난 후 빈 깡통을 보는데, 내게 도착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이 캔 안에서 그립고 익숙한 맛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내가 선택한 이탈과 나의 여기 있음이, 빈 깡통 안에 보였다. 현실적 제약과 사회적 경계를 뛰어넘고 싶은 호기심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날들이 자유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면, 필연 다른 것을 잃는 것도 감당해야 한다.
오래된 입맛은 쉬이 변하질 않으니... 문득 팥죽이 먹고 싶어지고, 그리움이 깊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재로 인한 그리움은,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며, 부재의 상태에 대한 불만족이기도 하였다. 나는 가끔, 유학을 선택함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어떤 것들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마음이 한 번 강해지면, 또 한 번 무너지는 날들의 반복.. 그저 나는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이구나 깨달으면서, 스스로를 또 속인다. 자꾸 뒤돌아보게 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야지...한다. 팥죽으로 빈 속을 달랬으니, 오늘밤, 사슴의 발처럼 뛰노는 다른 곳을 꿈꾸며... 잠들고 싶다.